탕-

 링을 맞고 튀어나온 공이 허공으로 떠오른다. 이 공은 아직 누구의 것도 아니다. 잡기 전엔 주인이 없다.

 힘차게 발을 굴러 뛰어오른다. 반팔 소매 밑으로 훤히 드러난 팔뚝에 오소소 소름이 돋는다. 뛰다 보면 좀 나아지겠지 했는데, 아직 몸이 덜 풀렸는지 바람이 감길 때마다 몸 전체가 얼어붙는 기분이다. 이럴 때일수록 더 독하게 부딪쳐야 한다. 바람보다 빠르게. 뜨거운 칼날이 되어. 언 공기를 가르며.

 튕겨나온 공이 가까스로 손끝에 감긴다. 공을 잡자마자 몸을 틀어 반 바퀴를 돌아 링을 향해 던졌다. 깨끗하게 네트를 가르는 소리에 상대편도 감탄하는 소릴 내며 박수를 보냈다. 바람을 뚫고 추위와 맞선 가치가 있는 페이드 어웨이 슛이었다. 이대로 질 수 없다며 나를 마크하던 검은 스냅백은 무리하게 돌파를 시도하다 공을 빼앗겼다. 그래봐야 3대 3 길거리 농구일 뿐인데, 왜 공만 잡으면 지나치게 열심이 되는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이곳의 사람들은 이곳의 계절을 닮았다. 어떨 땐 너무 뜨겁고, 어떨 땐 너무 차다.

 이름도 나이도 모르는 사람들. 적어도 이 순간만큼은 알아야 할 필요도, 알고 싶은 마음도 없어서 좋다. 세상사를 10분짜리 게임으로 요약해놓은 듯한 농구 코트 안에서 알아야 할 것이라곤 딱 한 가지뿐이었다. 우리편이면 공을 주고 상대편이면 공을 빼앗는다. 그 외에 사소한 규칙 같은 건 최소한을 제외하곤 대개 가볍게 무시되거나 목소리 큰 사람이 이기거나 했다. 그에 대해 딱히 불만을 가졌던 적은 없다. 이 사람들과 달리 나는 한 번도 이기려는 마음으로 게임을 한 적이 없었으니까.

 삐이이이- 하고 경기 종료를 알리는 휘슬이 들린다. 링을 맞고 튕겨나온 농구공은 쓸쓸하게 코트 바닥에 내리꽂혔다. 신이 나서 서로 하이파이브를 하는 사람들 틈으로 반대편 벤치에 혼자 앉아 있는 낯익은 실루엣 하나가 보인다. 눈을 가늘게 뜨고 노려보자 조금씩 얼굴의 형태가 분명하게 나타났다. 눈이 마주치자 웃으며 반갑게 손을 든다. 같은 편이었던 사람들에게 간단히 눈을 맞춰 인사하고 느적느적 벤치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뒷목에 맺힌 땀방울이 바람과 만나 서늘한 온도로 더운 몸을 식힌다.

 "오랜만이네."

 나는 만나서 반갑다는 말을 고작 그따위로밖에 못한다. 추운 날씨에 야외에서 오래 기다린 탓인지, 입술이 보랏빛으로 물들어 있었다.

 "이겼어?"
 "몰라."

 물결치는 눈꼬리를 접어 웃으며, 지훈은 다리를 달랑달랑 흔들어댔다. 뭐 그런 병신같은 대답이 다 있냐고 면박도 주지 않는다. 이미 알고 있는 것이다. 내가 어떤 인간인지.

 "언제 왔어?"
 "얼마 안 됐어."

 스프링을 내리누른 것처럼 몸을 위아래로 움직이며 들썩거리는가 싶더니, 갑자기 앓는 소릴 내면서 부르르 몸을 떤다. 벤치에 아무렇게나 구겨져 있던 외투 주머니에서 휴대폰을 꺼내다 슬쩍 녀석의 손을 보았다. 오늘도 주머니 안에 꽁꽁 감춰져 있는 그 손.

 "입을래?"

 외투를 내밀자 '진짜?' 하고 슬쩍 눈치를 본다. 내 옷인 걸 뻔히 알면서 왜 진작 안 입고 있었는지 모르겠다. 옷을 흔들며 가져가란 신호를 보내자 기다렸다는 듯이 받아가 팔을 꿴다. 옷이 조금 커서 꼭 형 옷을 훔쳐 입은 애 같았다. 그런 꼴을 하고도 뭐가 좋은지 생글생글 웃으며 손가락 밑으로 내려온 소맷자락을 살랑살랑 흔들어댄다. 내 기억으론 세 살 이후로는 해본 적이 없는 행동이었다. 신기해서 쳐다보고 있으니 커다란 눈을 더 커다랗게 뜨고 '응?' 하는 눈빛을 보낸다. 그 모습까지도 믿기지 않을 만큼 귀여워서 할 말을 잃고 '어?' 하며 멍청하게 되묻고 말았다. 그런 걸 대화랍시고 한다. '응?' 하고 묻고, '어?' 하고 답하며.

 "어떻게 알고 왔어?"
 "가게 갔더니 너 여기 있다길래."

 무슨 일이길래 가게까지 찾아온 걸까. 천하의 박지훈 님께서. 의아해하며 모바일 게임 푸쉬를 하나 하나 지우는 동안, 녀석은 말도 없이 계속 목이 빠져라 내 얼굴만 올려다봤다. 그러다 진짜로 목이 빠질까봐 어쩔 수 없이 엉거주춤 옆자리에 걸터앉았다.

 "무슨 일인데?"
 "잠깐 도망온 거야."
 "도망? 또 맞았어?"

 목소리에서 갈라지는 소리가 났다. 갑자기 소릴 질러서 그런 모양이었다. 아 그런 거 아니야. 지훈의 목소리도 덩달아 한 톤 올라간다. 짜증과 애교가 절반씩 섞인 말투였다.

 "그럼 뭔데? 주먹질 하던 놈이랑은 헤어졌다고 하지 않았어?"
 "맞아. 지금 만나는 건 다른 사람이야. 나이 많은 노땅."
 "왜 사귀는데, 그럼?"
 "사귀는 거 아니야. 일방적으로 들러붙는 거지."
 "니가 너무 착해서 그래."
 "싫은 티를 아무리 내도 못 알아 먹잖아."

 지훈은 짜증을 내며 옅게 한숨을 쉬었다. 지훈의 곁에는 언제나 남자가 끊이질 않았다. 그건 지훈이 가진 매력 때문이기도 했고, 지훈이 가진 태도 때문이기도 했다. 하긴 그 매력과 태도가 아니었으면 우리가 이렇게 친구로 지내는 일도 없었을 거다. 미적지근하고 애매모호한, 이도 저도 아닌 알 수 없는 관계. 그런 상태를 유지하며 상대방의 마음을 뒤흔들어 놓는 건 지훈의 특기였다. 지훈의 옆자리를 스쳐간 모두가 뻔히 알면서도 당했다. 나 역시 예외는 아니었다. '당했다'고 느끼는 건 그래도 괜찮았다. 하지만 '아니었다'고 깨닫는 건, 그것만은 묘한 슬픔을 불러 일으켰다. 거기엔 과거형이 주는 필연적인 씁쓸함과는 다른 아련함이 있었다.

 "딱 잘라서 싫다고 해. 그래도 계속 귀찮게 굴면 나한테 얘기하고."
 "니가 뭘 어쩌게?"
 "어쩌긴. 꺼지라고 해야지."

 진심으로 한 말인데 뭐가 우스운지 꺄르르 거리며 웃는다. 다른 사람이 그랬으면 비웃는 거냐고 따지고 들었을 텐데 지훈이니까 그냥 갸웃하고 만다. 왜 저러는지 이해할 순 없어도.

 "웃겨."
 "뭐가?"
 "구남친 같잖아, 너."
 "맞잖아. 구남친."

 아, 그러네? 대단한 발견이라도 한 것처럼 오, 하며 감탄사를 연발한다. 저 오버액션은 유전적으로 타고난 걸까, 환경이 만든 연기의 일종일까. 어느 쪽이더라도 고치기 힘들겠단 생각이 드는 건 마찬가지다.

 "약속했잖아, 우리."

 앞뒤를 다 잘라먹은 말에도 지훈은 눈치빠르게 말뜻을 알아듣고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입가에 남은 웃음이 주머니에 넣고 잊어버린 초콜렛처럼 끈적하고 찝찝한 뒷맛을 남긴다.

 "그래."

 '응?' 하고 '어?' 해서 시작된 대화는 결국 '그래' 하고 끝을 맺는다. 알맹이라곤 하나도 없는 말들이지만 이렇게 만나 무언가를 지껄이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위안이 된다. 서로를 이해할 순 없지만 서로에 대해 알게는 된다. 사람들은 모를 거다. 살다 보면 때론 그저 '알아줄' 사람이 절실해지기도 한다는 걸.

 "그만 들어가야 하지 않아? 벌써 한 시 반인데."

 너는 미안하지만 가야겠단 말을 고작 그따위로밖에 못한다. 몸에 비해 너무 길어보이는 소매 밖으로 한 쪽 팔을 빼는 걸 보고 손을 내저었다. 양심이 있지 저 옷을 받아 입느니 얼어죽는 편이 나았다.

 "그냥 입고 가."
 "안 돼. 너 춥잖아."
 "너도 춥잖아."

 솔직한 성격은 여전해서 아니라는 말은 또 못한다. 그래. 지훈은 짧게 답하고 엉거주춤한 포즈로 다가올 듯 말 듯, 어정쩡한 스텝을 밟았다. 잘못된 커플 댄스를 추듯이 나도 지훈을 따라 삐그덕거리며 움직이다 우스꽝스러운 자세로 멈춰 버렸다. 작별 인사를, 애정이 담긴 따스한 포옹을, 우리는 그렇게 실패한다.

 "가."
 "응."

 지훈은 소매 안쪽으로 손가락을 감춘 채 팔을 흔들며 반대 방향으로 멀어졌다. 멀어지는 뒷모습을 잠시 바라보다 턱이 덜덜 떨리는 걸 느끼고 후다닥 가게 방향으로 몸을 돌렸다. 후회가 나쁘단 건 알지만 매순간을 결심한 대로만 살 수만은 없는 법이다.

 안고 싶었다. 그래도 괜찮은 거라면. 땀을 흘리지만 았았다면. 지훈이 유난스럴 정도로 깔끔한 성격만 아니었다면. 아니, 두 사람 다 멈칫거리지만 않았다면. 그랬다면.

 두 팔을 문질러 온기를 만들며 나는 내 옷을 입은 지훈의 모습을 떠올렸다. 내 옷이 그렇게 컸던가. 이상한 기분이 든다. 나 아닌 다른 사람에게 입혀보기 전까지는 모르는 거다. 내 옷의 크기가 얼마나 되는지.

 그 사람 앞에 서기 전까지는 모르는 거다. 내 마음의 크기가 얼마나 되는지.





 자기소개를 해봅시다.

 동그란 안경 너머 나른한 눈을 한 어학당의 강사는 칠판 가득 읽을 수 없는 한글을 적기 시작했다. 때는 내가 사는 곳의 주소조차 읽을 줄 몰랐던 시절의 이야기다. 그럴 리 없겠지만 개새끼, 라든지 엿먹어, 같은 단어를 적었대도 알아차리지 못했을 것이다. 친절한 설명 뒤에 그것이 'Let me introduce myself'와 같은 의미라는 걸 알았을 때, 나는 잊을 만하면 찾아오는 폭설이나 지진을 겪은 것처럼 지겹고도 두려운, 무시무시한 익숙함에 사로잡혔다.

 나는 누구일까. 나는 어떤 사람일까.

 이미 사춘기 때 끝냈어야 할 고민을 가득 떠안고 심각해진 나를 뒤로 하고, 강사는 다음 시간까지 한국인 친구를 한 명씩 데려오라는 숙제를 내주었다. 약 5세 수준의 어휘력으로 서툰 한국말을 구사하고 한글은 제대로 읽지도 못하는 외국인들을 데리고 자기소개를 진행한다는 건 넌센스에 가깝다는 걸 경험으로 아는 듯했다. 그리고 일주일 뒤, 덕분에 평소보다 딱 두 배 더 북적이게 된 교실에서 유일하게 옆자리가 비어 있었던 건 나 혼자뿐이었다.

 이름이 뭐야?

 자연스럽게 - 존댓말을 할 줄 몰라서 - 말을 놓으며 다가오는 천진한 눈동자들. 그들 앞에서 벙어리가 될 수밖에 없었던 나. 한국어가 부족해 문제가 생긴 것으로 오해한 강사가 이런 일이 있을까봐 초대한 손님이 있다며 친동생을 앞세워 나섰지만 꽉 닫힌 내 입은 끝내 열리지 않았다. 강사는 몰랐을 것이다. 간단한 한국어조차 모르는 등신으로 알았던 큰 키의 대만인이 네이티브 못지 않은 발음으로 제 이름을 "씨발"이라 말할 줄은.

 제 이름은 박지훈입니다.

 그때였다. 강사의 친동생이 나를 곧게 바라보며 당돌한 목소리로 자기소개를 시작한 건. 순간 교실 안에 있던 모두의 시선이 그에게 쏠렸다. 또박또박한 발음으로 - 어학당 수업에 초대되었다는 걸 의식하고 말하는 것 같은 - 나이와 사는 곳, 취미 따위를 웃으며 말하는 그의 모습은 이 세상 생명체가 아닌 것처럼 너무 '귀여웠다'. 한국어로 '귀엽다'는 말은 상황에 따라 조금씩 의미를 달리 한다는 걸 알지만, 그날의 지훈은 'pretty'와 'cute'와 'shy'와 'fresh'와 'lovely'를 모두 합쳐 놓은 느낌으로 '귀여웠다'. 밑단을 걷어 올린 청바지 속 탄탄한 허벅지와 어깨에 맞춘 사이즈의 셔츠 아래 낭창낭창한 허리가 앉거나 웃을 때마다 슬쩍슬쩍 자기주장을 해왔다. 검은 속내로 그에게 호의를 보인 많은 녀석들이 허벅지와 허리에서 시선을 떼지 못하는 동안, 우습게도 나는 지훈의 팔목을 바라보고 있었다. 정확하게는 손등이었다. 제 몸보다 약간 헐렁한 셔츠의 소맷단은 손가락 둘째 마디까지 길게 내려와 손등을 감추고 있었다.

 손등을 보이지 않는 남자. 그게 내가 느낀 지훈의 첫인상이었다.






 딸랑-

 문을 당기자 녹이 슬대로 슨 작은 금색종이 아슬아슬하게 오른쪽 눈썹 위를 스치고 지나간다. 딸랑거리는 소리에 카운터 뒤에 앉아 있던 대휘가 벌떡 일어나는 것이 보였다. 제법 공손한 말투로 '어서 오'까지 말하곤 내 얼굴을 확인해더니 '야이씨' 하고 말을 바꾼다.

 "또, 또, 또! 너 또 지각이야!"

 옆에서 뭐라뭐라 시끄럽게 떠들어대는데 추워서 귀에 아무 것도 안 들어온다. 점심시간은 한 시까지라고 몇 번을 말해야 알아듣겠냐면서, 대휘는 작정을 하고 잔소리를 퍼부어댔다. 시끄럽다는 것만 제외하면 꽤 괜찮은 녀석이라 이 정도는 참고 들을 만했다. 대휘가 마음껏 떠들어대도록 놔두고 난로 앞에 자릴 잡고 앉아 무의식적으로 오른쪽 눈을 비벼댔다. 처음엔 멋도 모르고 벌컥 문을 열다가 눈두덩을 자주 얻어맞곤 했다. 왜 다치기 딱 좋은 높이에 방울종 같은 걸 달았는지 모르겠다.

 사실 방울종인지 뭔지 그것 자체가 싫은 건 아니었다. 오히려 마음에 들었다고 하는 게 맞을 거다. 손님을 알리는 벨소리마저 아날로그적인 이곳. 세월의 더께를 이고서 인간의 수명보다 긴 삶을 영위한 예술품들로 가득한 이곳은 외국인들이 자주 드나드는 앤티크 가게였다. 어학당을 오가는 길목에 있는 곳이라 별 생각없이 들어왔다가 분위기에 사로잡혀 아르바이트 자리를 얻었다. 가게의 주인격 되는 사모님은 내가 가진 훤칠한 외모와 3개 국어를 구사할 줄 아는 어학능력에 후한 점수를 주었다. 일어까지 했으면 완벽했을 텐데. 내 모습을 아래위로 훑어보고는 아쉬운 목소리로 말했던 것이 마음에 걸려, 나는 부족한 한국어와 계획에도 없던 일어까지 열심히 공부하기 시작했다. 나와 교대로 일하는 대휘는 훌륭하진 않아도 그럭저럭 쓸 만한 개인교사가 되어주었다. 고가구들이 상하지 않도록 두꺼운 암막을 치고 은은한 조명을 밝혀 놓은 덕에 가게는 늘 어둡고 포근한 느낌이었다. 그 안에 있으면 나도 시간을 거슬러 과거 어느 때에 멈춰 있는 기분이 들곤 했다. 게다가 손님은 적고 시급도 나쁜 편은 아니라 방울종 따위는 흠 잡을 것도 못 되었다.

 "어? 너 그러고 나간 거야? 옷 어쨌어?"

 뒤늦게 반팔 차림으로 떨고 있는 내 모습을 보더니 대휘는 높아진 목소리로 물었다. 빨리도 알아챈다. 나는 혀를 차고 성의없이 대답한다.

 "줬어."
 "누구한테?"
 "작은 사람한테."
 "웬만하면 다 너보다 키 작거든?"

 오늘따라 대휘는 평소에 비해 몇 배는 더 시끄러웠다. 귀찮아서 입을 닫아버렸더니 중얼중얼 볼멘소릴 하곤 슬그머니 제 외투를 가져다 던져준다. 입어봐야 짧을 걸 알아서 어깨에 걸치고 의자를 끌어 난로 앞에 앉았다.

 "아까 누가 찾아왔었어."
 "알아."
 "어떻게 알아? 만났어?"
 "응."
 "옷도 뺏기고?"
 "응."
 "둘 중 누구한테 뺏긴 거야?"
 "둘?"

 둘이라니, 얘기가 다르다. 날 찾아온 사람은 지훈 말곤 없는데. 내가 놀라 묻자 대휘는 덩달아 당황한 표정을 하고 나를 보았다.

 "만났다면서. 왜 놀라?"
 "두 명이었어? 확실해?"
 "너야말로 제대로 만난 게 확실해?"
 "어떻게 생겼는데?"
 "한 사람은 키가 나 만하고, 밝은 갈색 머리에 귀여운 얼굴? 민트색 후드 같은 걸 입고 있었는데."
 "다른 사람은?"
 "양복 차림에 머리는 까만색이었고, 그... 별 특징이 없어서 뭐라고 말해야 될지 모르겠다. 평범한 직장인처럼 보였어."

 그런 차림을 하고 농구 코트 주위를 어슬렁거렸다면 분명 눈에 띄었을 텐데 아무리 되짚어봐도 그런 사람은 본 적이 없다. 그보다 내가 아는 사람 중에 '평범한 직장인'은 존재하지 않았다. 내가 계속 모르겠단 얼굴을 하자, 대휘는 흐음 하곤 좀 더 말을 보탰다.

 "둘이 서로 존댓말하던데."

 존댓말이라. 순간 자꾸 누가 들러 붙는다 말하던 지훈의 말이 떠올랐다. 혹시 도망쳐왔다던 그 상대인가.

 "아는 사람 맞아?"
 "아닐지도."

 그게 무슨 말 같지도 않은 소리냐는 듯이 대휘는 할 말을 잃고 얼굴을 구겼다. 아는 사람인지 아닌지 그런 건 별로 중요하지 않다. 우리편인지 상대편인지, 그것만이 중요할 뿐.

 "알아봐야지. 이제부터."

 그에게 공을 넘겨주어도 괜찮을지, 빼앗아도 괜찮을지를.





 네가 나에게 처음으로 손등을 보였던 날을 기억한다.

 서울의 기온이 30도를 돌파하던 어느 초여름이었다. 나는 아르바이트 - 그때는 신촌에 있는 어느 레코드 가게에서 일하고 있었다 - 시간에 늦기 일보직전이었고, "같이 볼링 치자"며 어학당 동급생들이 번갈아 가며 전화를 해대는 통에 주머니에 든 휴대폰에선 끊임없이 진동이 울려대고 있었다. 한 마디로 머리 끝까지 짜증이 올라온 상태였다.

 "니가 라이관린 맞지?"

 더운 날씨에 반팔 차림을 한 지훈은 그날도 등 뒤로 손등을 감추고 있었다. 나는 애써 지훈의 존재를 무시하고 가던 방향으로 계속 걸어갔다. 뒤에서 다급히 따라붙는 발소리가 들렸지만 내 알 바 아니었다.

 "야, 잠깐만. 오늘 저녁에 시간 있어?"
 "아니. 일하러 가야 돼."

 아, 그래? 이런 식으로 거절 당하는 게 익숙지가 않은지, 지훈은 당황한 얼굴로 할 말을 잃고 버벅거리기만 했다. 나는 일부러 좀 더 속력을 내 어학당 반대편으로 방향을 꺾었다. 떠들기 좋아하는 사람들에게 목격돼 괜한 오해를 사는 건 질색이었다.

 지훈은 어학당 내의 인기인이었다. 모두가 지훈을 좋아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모두'가 '좋아했다'는 것부터가 잘못된 일이었다. 자기소개 시간에 초대되었던 것을 계기로 지훈은 어학당 내 소모임에 자주 합석을 하곤 했다. 모임이라고 해봐야 대개가 수업 후에 볼링을 치거나 클럽에 가거나 술을 마시거나 하는 일들뿐이었다. 지훈은 동시에 너무 많은 사람들과 가까워졌고, 너무 빠르게 가까워졌으며, 너무 자주 가까워졌다. 언젠가부터 사람들 사이에서 슬금슬금 지훈에 대한 좋지 않은 이야기들이 돌기 시작했다. 험담은 주로 지훈과 가깝게 지내던 남자들의 입에서 나왔다. 그렇게 자신의 평판이 깎여나가는 동안 지훈이 한 일이라곤 더 많은 남자들을 만나고 다닌 것이 전부였다. 사람들은 더 이상 모임에 지훈을 부르지 않았다. 겉보기에 달라진 것은 없는 듯했다. 여전히 모두가 지훈을 좋아했다. 예전처럼 다같이 있는 장소에서 좋아하지 않고 단둘이 있을 때만 좋아하길 원했을 뿐. 전염병처럼 번진 면피의 소용돌이에서 유일하게 입을 닫은 사람은 내가 유일했다. 유행의 최정점에 있던 '박지훈과 연애하기' 놀이에서 한 발짝 물러서 있던 것도, 역시, 나 혼자뿐이었다. 그러니 지훈이 제 발로 나를 찾아왔던 것도 생각해보면 그렇게 놀랍지만은 않은 일이었다. 나는 직감했던 건지도 모르겠다. 마침내 내 차례가 된 거구나, 하고.

 "언제 끝나는데? 같이 술 한 잔 하자."

 지훈은 포기를 모르는 사람처럼 끈질기게 내 뒤를 쫓아왔다. 나는 갑자기 걸음을 멈추고 홱 뒤를 돌았다. 숨이 턱 밑까지 올라와 헉헉대던 지훈의 얼굴이 속도를 이기지 못하고 내 어깨에 쾅 이마를 찧으며 부딪쳤다. 아야! 지훈은 이마를 문지르며 동그란 얼굴을 들어 영문을 모르겠단 눈빛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누군데, 너."

 그런 질문을 하기엔 둘 사이의 거리가 너무 가깝단 생각을 했다. 나와 같은 생각을 한 건지, 지훈은 뒤늦게 어색한 뒷걸음질을 치며 시선을 떨어뜨렸다.

 "아.... 미안. 내 이름은 박지훈이야."
 "누가 이름 물어봤어? 너 뭔데?"

 경계심과 성가심이 잔뜩 묻은 말투에 지훈의 표정이 미묘하게 일그러졌다. 처음 보는 표정이었다. 예쁘고 귀엽기만 한 것이 아닌, 감춰왔던 진짜 박지훈의 표정.

 "난 내가 누군지 몰라. 너도 그렇지 않아?"

 마음 속에만 있던 생각을 그렇게 소리내어 말해보기는 처음이었다. 내가 뱉은 말의 무게를 감당할 자신이 없어, 나는 지훈이 그랬던 것처럼 스르르 시선을 아래로 떨어뜨렸다. 우리는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한참을 그렇게 서 있었다. 한여름의 따가운 햇살에 마음을 그을리며. 뒷목을 타고 신선한 눈물 같은 땀방울이 하염없이 흐르도록 내버려둔 채.

 티셔츠 자락을 꼭 움켜쥔 지훈의 손등이 햇빛을 받아 하얗게 빛나고 있었다.





 - 오늘 저녁에 시간 있어?

 언젠가 지훈이 내게 했던 말을, 나는 이제서야 그에게 다시 돌려보낸다. 잘 들어갔느냐고. 그 남자가 또 귀찮게 하지는 않았느냐고. 아홉 글자 안에 축약된 수많은 말들이 손끝에서 떠나간다. 톡을 보내면 마음이 가벼워질 줄 알았는데, 지훈에게 답장이 오기 전까진 그럴 수 없다는 걸 뒤늦게 깨달았다. 대휘가 두고 간 얇은 가디건을 어깨에 두르고 - 옷이 작아서 맞지는 않았다 - 고풍스런 난로 앞에서 몸을 녹이며 십 초마다 한 번씩 휴대폰을 보았다. 목이 간질간질해서 꼭 감기가 올 것만 같았다. 햇살이 뜨거웠던 그해 여름, 네가 선물했던 것만큼이나 지독한 감기가.

 "사람들에게 사랑받는 게 나쁜 건 아니잖아."

 술병 대신 밀크쉐이크 컵을 들고 빨대를 쪽쪽 빨면서, 볼이 발그레해진 지훈은 볼멘소리로 말했다. 누가 나쁘댔나. 들리지 않게 중얼거리고 콜라 대신 얼음만 남은 컵뚜껑을 땄다. 과하다 싶을 정도로 냉방을 빵빵하게 올린 패스트푸드점엔 우리 말고도 더위를 피하러 온 사람들이 각자 앞에 아이스크림이나 음료수 따위를 놓고 드문드문 앉아 있었다.

 "난 그다지 상관없는데."

 나는 어금니로 얼음을 아그작아그작 깨부수며 어눌한 발음으로 대답했다. 주머니 안에선 아직까지도 끈질기게 휴대폰 진동이 울려댔다. 나는 전화의 출처가 가게인지 어학당 쪽인지 알 수가 없어 전화를 받지도 못하고 몸만 배배 꼬았다. 앞에 앉은 지훈만 아니었다면 당장 전화기에 대고 소리쳤을 거다. 씨발, 하고.

 "그렇게 센 척하면 뭐가 좋아?"

 앙칼진 눈매와 비스듬히 올라간 입꼬리를 보고 비아냥거리는 말이란 걸 알았다. 센 척이라. 남들 눈에 나는 그런 이미지인가. 어깨를 으쓱 하곤 바지 주머니 안으로 손을 넣어 더듬더듬 전원 버튼을 찾아 꾸욱 길게 눌렀다. 가게든 어학당이든 어느 쪽도 지훈보다 중요하진 않았다.

 "사랑받진 못하지만 괴롭힘 당하지도 않지."
 "괴롭혀? 너를? 누가?"
 "아직은 없지만 미리 해둬서 나쁠 건 없잖아."

 그런 걸 '예방한다'고 하던가. 어딘가에서 주워들은 단어를 말하자 지훈은 제법이란 듯 '오~' 하고 감탄하는 소릴 냈다.

 "너는? 왜 그러고 다니는 건데?"
 "너랑 비슷해. 일종의 보험이야. 언제 외로워질지 모르잖아."

 원래 외로움이란 게 사람이 가장 약해졌을 때 달려들어 물어뜯는 법이거든. 변명이랍시고 그런 낯뜨거운 말을 지훈은 부끄러워하는 기색도 없이 잘도 중얼거렸다. 내가 어처구니 없다는 듯이 헛웃음을 짓자, 지훈은 의자에 몸을 기대며 한 박자 늦게 민망한 얼굴을 했다.

 "이해 못 하겠단 표정이네."
 "미안. 난 이사라면 지긋지긋해서."
 "이사?"
 "이사 다니는 거잖아. 이 사람에서 저 사람으로."

 하핫, 하고 지훈은 콜라처럼 시원한 웃음을 터뜨렸다. 보고만 있어도 더위가 가시는 그런 웃음이었다. 마지막 남은 얼음을 먹으려 컵을 기울이자, 지훈은 호기심이 반짝이는 눈을 하고 테이블 앞으로 몸을 기울였다. 그리곤 맞선 자리에서 만난 남녀처럼 판에 박힌 지루한 질문을 던지기 시작했다.

 "고향은 어디야?"
 "타이페이."
 "한국 말고 가본 나라는?"
 "어릴 때 LA에 있었어."
 "그때도 이렇게 까칠했어?"
 "아니. 에드워드는 모범생이었으니까."

 지훈은 얼굴 가득 물음표를 그리며 응? 하고 되물었다. 악의라곤 티끌 한 점 없는 표정이었다.

 "LA에선 에드워드라는 이름을 썼어. 대만으로 돌아갔을 땐 친구들이 린린이라 불렀고. 여기서의 내 이름은 관린이야. 린린은 착하고 다정했는데 관린이는 그렇지가 않아. 말도 별로 없고 날카로워. 한국말은 어렵고 늘 혼자거든."

 아그작아그작. 나는 이가 시릴 만큼 꼭꼭 힘을 주어 얼음을 씹었다. 얼음 때문인지 에어컨 바람 때문인지 팔이 좀 추운 것도 같았다. 으슬으슬 한기가 올라오는 두 팔을 커다란 손바닥으로 슥슥 문지르고, 나는 음식을 더 권하듯 지훈의 얼굴을 힐끔거리며 물었다.

 "더 듣고 싶어?"

 지훈은 말없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좋았던 분위기를 단번에 망치는 건 내가 가진 몇 안 되는 재주 중 하나였다. 기분이 상해 그만 가버릴거라 생각했는데 뜻밖에도 지훈은 입을 열어 자신의 이야기를 털어놓기 시작했다.

 "나도 얼마 전까지 중국에 있었어. 2년 정도."
 "거짓말."
 "진짜야."
 "중국어 한 마디도 못 하잖아."
 "아니거든?"

 내 말에 발끈했는지, 지훈은 보란 듯이 허술하기 짝이 없는 페키니즈를 더듬더듬 늘어놓았다. 그 모습이 너무 웃겨서 으하하, 하고 크게 웃어버리고 말았다. 한국어를 하는 내 모습도 저렇게 병신 같을까. 저것보단 낫겠지. 저것보단 나아야 할 텐데, 하며.

 "왜 웃는지 알아. 그때에도 애들이 많이 놀렸어. 이유없이 괴롭힘도 많이 당하고."
 "너처럼 귀여운 애를?"
 "게다가 그땐 돼지였으니까 놀림 당할 만했지, 뭐."
 "너 꼭 그거 같다."
 ".....?"
 "자존심이 품절됐어."

 으하하하하! 지훈은 갑자기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발까지 굴러가며 미친 사람처럼 웃어대기 시작했다. 내가 뭘 잘못 말했나? 멍청한 얼굴로 왜 그러느냐 물어도 소용이 없었다. 바보가 된 기분이었다. 지훈은 숨이 넘어가기 직전까지 끅끅대다 눈물을 찔끔 흘리고서야 겨우 진정이 되었다. 그런 건 자존심이 바닥이라고 하거나 애정결핍이라고 하는 거야. 눈가에 맺힌 눈물을 닦아내며 지훈은 조곤조곤한 목소리로 둘 사이의 차이점에 대해서도 설명해주었다.

 "네 말이 맞을지도 몰라. 사람들을 계속 만나는 것도 그런 이유에서야. 그래야 내가 나를 관리하게 되니까. 다신 예전 모습으로 돌아가고 싶지 않거든."
 "예전의 너도, 지금의 너도, 모두 박지훈이야."
 "그땐 슌이었어."

 슌. 그 이름을 말하는 지훈의 표정은 썩 유쾌하지 않았다. 밀크쉐이크 컵을 만지작거리는 작은 손가락을 바라보다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지훈이 감추려 했던 건 손등이 아니라 슌이었던 과거의 한 조각이 아닐까 하는.

 "넌 누구로 살 때가 제일 행복했어?"
 "모르겠어. 넌 누구랑 사귀었을 때 제일 행복했는데?"
 "모르겠네."

 계속해서 찾아봐야지. 지훈은 웃으며 한결 가벼워진 얼굴로 눈을 맞췄다. 꼭 '다음 타자는 너' 하고 말하는 것 같은 눈빛을 보내며.

 다음날, 나는 시원한 욕 한 바가지와 함께 아르바이트에서 잘렸다. 새 아르바이트 자리를 알아보러 다니며, 나는 간간이 울리지 않는 휴대폰을 들여다 보았다 말았다 했다. 녀석이 밀당 중이란 걸 알았지만 내 자제력은 이미 품절된 지 오래였다. 처음 몇 번은 튕길 것을 각오하고 전화를 걸었지만, 의외로 지훈은 한 번에 내 전화를 받아주었다. 전화로 듣는 지훈의 목소리는 지독한 코맹맹이 소리가 났다. 감기에 걸렸다고 했다. 한 시간 넘게 앉아 있던 패스트푸드점의 과한 냉방이 원인인 것 같다며. 1분이 채 되지 않는 짧은 통화시간 내내 지훈은 열세 번 기침을 했다. 두 시간 뒤 나는 약국에서 산 김기약을 들고 지훈의 집 앞에 서 있었고, 정신을 차렸을 때 우리는 첫키스를 나누는 중이었다.

 아무도 말은 하지 않았지만 몸으로 느낄 수 있었다. 우리 사이에 뭔가가 시작되었다는 걸. 너의 마음에서 나의 마음으로 감기처럼 옮아온 외로움이 우리를 하나로 묶어버렸음을.

 그날 우린 같은 바이러스에 감염되었다.

 지훈은 그걸 사랑이라 불렀다.





 발돋움을 해가며 나누던 키스. 껴안으면 입술을 간질이던 매끄러운 머리칼. 가끔은 입술보다 이마에 입 맞추는 걸 더 좋아하던 너.

 눈을 감고 익숙한 그 얼굴을 그리다 보면 운명처럼 떠오르는 이미지들. 가슴께가 간질거리다 못해 뻥 뚫린 것처럼 먹먹하게 만드는 기억의 단편.

 귀여운 외모와 다르게 지훈은 누군가에게 쉽게 기대려 하지 않는 성격이었다. 아파도 아프단 말을 하지 않았고, 곤란한 일이 생겨도 도움을 청하는 일 없이 혼자 힘으로 해결하려 들었다. 따지자면 지훈은 모든 걸 견뎌내는 쪽이었다. 인내심이 대단하고 자립심이 강하단 게 흠은 될 수 없겠지만, 그런 사람을 연인으로 둔 입장에서 내 마음은 자주 서운하거나 안쓰럽거나 했다. 가끔은 섭섭한 마음으로 지훈의 손등을 하염없이 내려다보기도 했지만, 손등에 구멍이 나도록 노려보아도 내게는 보여주지 않는 그 무엇이 뒷면에 숨어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한 마디로 지훈은 내게 끝까지 비밀스러운 사람이었다.

 그런 지훈이 제 몸을 완전히 맡기고 내게 의지하는 건 오로지 섹스를 할 때만이었다. 그 순간만큼은 둘 사이에 감출 것이 없었다. 나는 내 허벅지 위에 지훈을 앉혀 놓고 하는 걸 가장 좋아했다. 항상 내려다보았던 지훈의 얼굴을 같은 눈높이에서 보는 건 신선하고 색다른 느낌을 주었다. 내가 힘을 줄 때마다 저절로 찡그려지는 미간. 촉촉하게 젖어가는 눈과 일그러진 입술의 곡선. 초 단위로 변하는 선명하고 생생한 감정의 떨림을 가까이서 관찰하고 있으면 마치 지훈의 모든 것을 꿰뚫고 있는 기분이 들었다. 한 손으로 허리를 받치고 다른 한 손으론 뒤통수를 감싼 채. 부드럽게 밀려갔다 고요히 물러나면서. 귓가에 퍼지는 숨소릴 연료 삼아. 끝도 없이 그렇게.

 "너는 너무 조심스러워."

 섹스가 끝나고 나면 지훈은 웃으며 그렇게 말했다. 조금 더 함부로 해도 괜찮아, 하며. 자그마한 두 손으로 내 커다란 손바닥을 조물조물 주무르며 손장난 치는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이 작고 귀여운 생명체를 어떻게 함부로 대할 수가 있다는 건지 도무지 내 머리로는 납득이 되질 않았다. 그럴 때마다 나는 걸리버가 된 심정으로 손을 펼쳐 지훈의 동그란 뒤통수를 쓰다듬거나 탱글탱글한 엉덩이를 감싸 쥐거나 했다. 그때만은 지훈도 민망한 웃음을 터뜨리지 않고 내 손가락을 자기 입 안에 넣어 빤다든가 내 배 위로 올라 앙큼한 요망을 떤다든가 하는 식으로 나의 섹스 판타지를 200% 만족시켜 주었다.

 "난 그렇게 약하지 않아."

 '조금만 더' 하는 심정으로 잔뜩 경직된 내 몸을 밀 때면 충격을 못 이기고 튕겨나가던 작은 몸. 그래서 늘 가진 힘의 절반만을 쓰곤 하던 내게 네가 입버릇처럼 하던 말. 그런 말을 하는 동안에도 고목나무에 달린 매미처럼 내 몸에 팔을 감고 안겨 있던 너.

 "험하게 다뤄서 강해진 것 뿐이지. 사람은 누구나 약해."

 말해놓고 보니 그건 지훈을 향한 말이라기보다 나 자신을 향한 말처럼 들렸다. 그래서 굳이 쓸모없는 말을 덧붙여야만 했다. 약하지 않다고 일부러 거칠게 대할 필요는 없는 거야, 하고.

 우리가 사귄다는 소식은 어학당 내에 빠르게 퍼졌다. 다수의 예상을 깨고 우리는 꽤 짧지 않은 시간 동안 별 탈 없는 순탄한 연애를 이어갔다. 다른 커플들처럼 달달하고 로맨틱한 이벤트는 없었지만 꾸준히 데이트를 하고 결국엔 '미안해'로 끝나는 말다툼을 하며. 지훈의 표현에 따르면 - 나는 그 의견에 반대했지만 - 우리는 서로에게 황사 마스크나 비닐 우산 같은 존재였다. 필요한 시기에 적절하게 쓰임을 다하고 폐기되는. 지훈의 생각이 어떻든, 나는 그에게 좋은 집이 되어주고 싶었다. 더는 이사를 다니지 않아도 될 만큼 포근하고 안락한 집. 발가벗고 고함을 지르거나 머리를 감지 않은 채 며칠을 있어도 괜찮은. 세상에서 가장 사적이고 은밀한 너만의 집. 최소한 그렇게 되기 위해 노력은 했던 것 같다. 헤어질 때 가슴이 아팠던 건 그 때문일 것이다.

 우리의 관계가 깊어지고 길어질수록 내 마음은 더욱 확고해졌고, 나는 얼굴을 보지 않으면 불안하단 핑계로 말도 안 되는 고집을 부려 기어이 지훈을 매일 아침 어학당에 나오도록 만들고야 말았다. 대신에 수업이 끝나면 집까지 업어서 데려다줘야 한다는 지훈의 요구를 들어주어야 했다. 실행에 옮겨보니 업는 사람이나 업히는 사람 모두 소름끼치게 창피해서 비록 지훈을 등에 업고 길을 걸은 시간은 다 합쳐서 채 10초도 되지 않았지만. 모두가 만만하게 보던 남자와 거북하게 보던 남자가 만나 함께 돌아다니기 시작하자 사람들은 우리 곁에 얼씬조차 하지 않았다. 무리에서 격리되는 자의 숙명처럼 그 뒤로 온갖 소문과 루머가 우리에게 따라붙었지만 나도 지훈도 개의치 않았다. 그렇게 어제와 비슷한 오늘이, 오늘과 비슷한 내일이 흘러갔다. 내 한국어 실력은 몰라보게 좋아졌고, 지훈은 내게 정착한 것처럼 보였다. 지훈이 진영아, 하고 부르던 그 녀석이 나타나기 전까진 그랬다.

 헤어지자고 했다. 조금도 괴로워 보이지 않는 표정으로, 가늠도 할 수 없을 만큼 괴로운 마음을 숨긴 채, 지훈은 밑도 끝도 없이 그렇게 말했다. 아니, 정확히는 헤어져달라고 했다. 어쩌면 헤어지자고 말해달라고 했는지도 모른다. 뭐라고 했든 한국어의 미묘한 차이를 모르는 내게는 다 같은 말이었다. 나는 몰랐다. 끝내 알지 못했다. 지훈이 내게 헤어지자고 했던 이유를. 진영의 등장으로 헝클어져 버린 마음의 시작과 방향을. 2년 전, 상해에서 있었던 두 사람 사이의 일들을. 죽을 만큼 억울했다. 알지도 못하는 이유로 이별을 통보받아야 한다는 게. 지훈이 나 아닌 다른 사람과 과거 한때의 비밀을 공유하고 있다는 게. 하지만 그 중에 가장 억울했던 건 그럼에도 내가 지훈을 놓아줄 수밖에 없을 거라는 걸 우리 둘 다 인정하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헤어졌다, 우린. 쿨하고 담백하게. 강요된 이별이 억울해, 나는 쭈뼛거리며 지훈에게 좋은 친구로 남고 싶다 말했다. 그리고 아무 남자나 만나고 다니는 건 싫다고도 말했다. 정확히는 너 자신을 함부로 낭비하지 마, 라고 말했던 것 같다. 아니면 자존심을 품절시키지 말라고 말했든가. 주제 넘은 참견이었지만 지훈은 고개를 끄덕이며 알겠다고 약속해주었다. 너는 내게 부탁하고픈 게 없느냐고 묻자, 지훈은 내게 센 척하고 강한 척하는 관린이 아닌 본래의 내 모습을 보고 싶다 말했다. 너는 다정한 사람이니까. 그렇게 말하며 내 손 위에 작은 그늘을 만들던 너의 손등. 그 말을 듣고서야 나는 나 역시도 지훈에게 비밀스러운 인간이었다는 걸 깨달았다. 내가 '슌'을 모르듯, 지훈은 '에드워드'나 '린린'을 몰랐다. 우리는 서로에게 발가벗고 고함을 지르거나 머리를 감지 않은 채 며칠을 뒹구는 모습을 보여줄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던 것이다. 누군가의 집이 되어주려면 나부터 숨기는 것 없이 내 안을 모두 비워내야 한다는 걸, 어렸던 나는 미처 몰랐다.

 어디에도 마땅한 곳이 없으면 다시 내게로 돌아와달라는 말은, 그래서, 끝끝내 말하지 못했다.

 - ♪♩♬

 인위적인 오르골 소리가 뽀얀 먼지가 피어오르는 앤티크 가게의 유리창 위로 시간을 되돌려놓는다. 손바닥을 내려다보니 밝게 불이 켜진 휴대폰 창에 알림이 떠 있었다. 커튼을 먼저 칠까 문자부터 확인할까 고민하다 무심결에 휴대폰 액정을 건드렸다.

 - 미안. 선약이 있어.

 마음의 준비가 되기도 전에 글자 속에서 지훈의 목소리가 튀어나와 내 얕은 희망을 산산조각낸다. 고작 그 말을 들으려고 몇 시간을 안절부절 못하고 기다렸던 내 모습이 우스워, 나는 알겠다는 답도 하지 않고 휴대폰을 덮어버렸다. 그때나 지금이나 나는 여전히 솔직하지 못해서. 네 앞에만 서면 조심스러워져서. 좋다는 말도 싫다는 말도 못하고. 네 말에 상처받거나 기뻐하거나 하는 일밖엔 못하고.

 이렇게 될 줄 알았으면 한 번쯤은 거칠게 안아볼 걸 그랬지.

 조금이라도 빨리 씻고 싶은 맘에 끝나기 무섭게 몸을 빼며 작은 새처럼 파다닥 달아나던 너. 그런 너를 한 번쯤은 붙잡아 볼 걸. 더럽다고 안 된다고 버둥거리는 널 몸이 부서져라 안고서 이게 마지막인 것처럼 키스해 볼 걸.

 조금만 더 일찍 알았더라면. 우리의 이별을. 널 향한 내 마음의 온도를.

 목이 잠긴다. 아주 오래도록 앓은 감기가 재발한 듯, 눈물이 핑 돌 만큼 따끔한 기침이 가슴 속에서부터 터져나온다.





 딸랑-

 "또! 또! 관린이 너 또!"

 그래. 또다. 급하게 들어오느라 문을 벌컥 열다가 또 방울종에 이마를 얻어맞았다. 눈썹 위가 화끈거려 손가락을 갖다대자 붉은 핏물이 왕창 묻어나온다. 문 앞에 멍청히 서서 핏물이 톡 톡 떨어지는 손가락을 바라보다 홧김에 세게 문을 걷어찼다. 딸랑딸랑- 눈치도 없이 방울종은 시끄럽게 울어댔다. 또, 또, 또, 또, 또, 그리고 또.

 포악한 거인족 같으니. 눈에 띄는 건 죄다 때려부술 기세로 씩씩대는 나를 보고 대휘는 움찔하더니 카운터 뒤로 몸을 피했다. 지긋지긋하다. 매일같이 반복되는 실수가. 후회해도 그때뿐인 미련이. 오늘도 지각을 하고, 그깟 방울종 하나 못 피하고, 도무지 학습이란 걸 모르는 인간처럼 삽질을 거듭하는 내 자신이 싫어서 견딜 수가 없다.

 "야, 피 나잖아."

 저만치에서 눈치만 살피던 대휘가 걱정스러운 얼굴을 하고 조심조심 다가와 상처를 살폈다. 살갗이 찢어진 것 같다며, 병원에 가자고 설득하는 대휘를 뿌리치고 티슈로 대강 상처 부위를 눌렀다. 운이 좋으면 스치고, 운이 나쁘면 눈에 맞고. 그 두 가지만 생각하느라 언젠가는 제대로 부딪쳐 피 흘리게 될 거란 생각까진 하지 못했다.

 "진짜 병원 안 가도 돼?"
 "괜찮아. 안 죽어."
 "그래도 흉질 텐데."

 대휘는 말끝을 흐리며 흐응, 하고 한숨을 쉬곤 구급상자를 찾아 가게 뒤편으로 사라졌다. 흉터가 남을까. 그건 그대로 나쁘지 않은 일이다. 같은 실수를 저지르지 않으려 노력이라도 하게 될 테니까.

 - 화났어?

 어제 주고받던 대화가 그런 식으로 끊긴 게 마음에 걸렸는지, 늦은 밤이 되어서야 지훈은 느닷없이 톡을 보내왔다. 열두 시가 넘은 시간이었다. 막 자려던 참이었고 컨디션도 좋지 않아 뭐라 답을 하는 것이 내키지 않았다. 휴대폰을 등지고 누워 이불을 뒤집어쓰고 억지로 눈을 꾹 감았다. 전화벨이 울린 건 그로부터 30분 뒤였다. 이런 시간에 전화를 걸어올 사람은 딱 하나밖에 없었다. 새하얀 빛덩어리처럼 변신한 휴대폰 액정엔 '지훈'이란 두 글자가 눈부시게 발광하고 있었다.

 - 자?

 누가 내 다리를 부러뜨렸대도 한 방에 화가 다 풀릴 만큼 부드럽고 간질간질한 목소리였다. 아니. 나는 한숨을 쉬고 이불을 걷어찼다. 자기는 다 글렀구나, 생각하며.

 - 어디 아파? 목소리가 안 좋아.
 "그냥 좀 피곤해서."
 - 끊을까?
 "아니."

 솔직하지 못한 두 사람의 통화는 때로 말소리보다 침묵이 더 길어지기도 하는 법이다. 나는 참을성 있게 지훈의 다음 말을 기다리며 지끈거리는 이마를 손등으로 내리눌렀다. 열이 좀 나는 것 같았다.

 - 내일 저녁은 괜찮은데.

 지훈은 한참 만에 달랑 그 한 마디만 하고서 다시 묵음모드로 돌아갔다. 뭐라고 말해야 좋을지 몰라서 이마를 짚은 채 글쎄, 하며 말끝을 흐렸다. 내일 저녁이라고 특별한 약속이 있는 건 아니었다. 나는 그저 유치한 감정 싸움에 주도권을 잡아보려 애처럼 덤벼들고 있을 뿐이었다.

 - 너무 늦은 거야?
 "선약이라는 게, 귀찮게 군다던 그 녀석이었어?'
 - 아니, 그냥 친구. 덕분에 한 숨 돌렸지.
 "내일도 그 녀석 피하려고 나랑 만나려는 건 아니지?"

 풋, 하고 웃는 소리가 수화기를 타고 들려왔다. 옷도 돌려줄 겸 이쪽으로 오겠다는 걸, 내가 가겠다고 굳이 고집을 부려 약속을 잡았다. 지훈을 우리 집으로 불러봐야 어차피 집까지 바래다줘야 하니 차라리 내가 가는 것이 나았다. 그렇게 전화를 끊고 나니 잠이 오질 않았다. 우습게도 방울종 생각이 자꾸 났다. 딸랑딸랑, 예쁜 소릴 내며 짤랑이던 방울종. 내 이마에 매번 같은 멍자국을 남기던 방울종. 시간이 멈춰버린 앤티크 가게 출입구에 매달려 경보음처럼 울려대던 방울종.

 헤어지자마자 진영이란 친구와 사귈 거란 예상과 달리, 지훈은 꽤 오랜 기간 한 남자에 정착하지 못하고 이리저리 떠돌아다녔다. 사귈 때만큼 자주 연락하진 않았지만 가끔씩 안부를 묻거나, 만나서 알맹이도 없는 이야기를 떠들어대거나, 생일 선물을 건네거나 하는 일은 드문드문 있었다. 아주 가끔 지훈은 술에 취해 감정이 넘친 상태로 전화를 걸어 앞뒤가 맞지 않는 말들을 늘어놓기도 했다. 대개 그 술주정은 '만날래?'로 시작해서 '미안해'로 끝나곤 했다. 그러면 나도 질세라 있는 힘껏 술을 퍼마시고 지훈의 집을 찾아가 문을 두드리고 행패를 부렸다. 한 마리 술 취한 개새끼를 지훈은 싫은 낯도 없이 기꺼이 맞아주었다. 나는 꼴사납게 술냄새를 풍기며 커다란 곰인형을 안듯 지훈을 껴안고 잠든 것도 깨어 있는 것도 아닌 상태로 밤을 지새우다 집으로 돌아왔다. 나는 그딴 식이었다. 취해 있을 때만 솔직해졌고, 쓰잘데기 없는 곳에서만 분별력을 발휘했다.

 딸랑딸랑. 머릿속에 방울종이 울린다. 돌이켜 보니 우리는 사귀었던 기간보다 더 긴 시간을 이런 식으로 지내는 데에 낭비하고 있었다. 기껏해야 부딪쳐 멍이나 들겠지, 하는 마음으로. 이렇게까지 아프게 될 줄 모르고.

 이제 그만둘 때가 된 건가.

 열 오른 이마 위로 야트막하게 부풀어오른 상처 자리가 반창고 아래 숨는다.





 딩동-

 이곳의 벨소리는 주인의 성격만큼이나 직설적이다. 클래식한 멜로디를 빌지 않고도 손님이 왔다는 신호를 짧고도 분명하게 전달한다. 벨소리가 울린 후에도 응답이 없어 집 앞에 서서 문이 열리기를 차분히 기다렸다. 지훈은 나를 조금 더 기다리게 한 후에야 현관문을 열어주었다. 이건 새로운 형태의 밀당인가. 잠시 생각하다 지훈의 당황한 얼굴을 보고서야 그게 아니란 걸 알았다.

 "왜 그래?"

 너무나도 편안한 차림에 너무나도 불편한 표정을 하고 있는 것이 수상해, 나는 직감적으로 현관문을 당기며 집 안으로 고개를 드밀었다. 지훈이 잠깐, 하고 외치며 나를 막으려 들었지만 물러서지 않았다.

 "누구야?"

 신발장 앞에 안쪽을 향해 코가 놓인 검은 구두 한 켤레를 막 발견했을 때였다. 낯선 남자의 목소리가 방 안에서 들려왔다. 동시에 나와 지훈은 약속이나 한 것처럼 서로의 얼굴을 마주보았다. 지훈은 입술을 꼭 깨문 채 마른 침만 꿀떡 삼켰다. 그래서 나는 또 한 번 직감을 발휘할 수밖에 없었다. 대휘가 말했던 평범한 직장인이 저 녀석이구나, 하고.

 "미안. 내가 나중에 설명...."
 "필요없어."

 어떻게든 나를 들여놓지 않으려 애를 쓰는 지훈을 가볍게 밀어내며 거침없이 집 안으로 들어섰다. 지훈은 계속 '잠깐'을 연발하며 팔이 빠져라 손목을 잡아당겼다. 팔이 빠지면 빠졌지 이대로 물러서고 싶지 않은 마음에, 나는 고집스레 몸을 당겨 지훈의 손을 떨쳐냈다.

 "잠깐, 좀 기다려봐!"
 "기다려? 뭘?"

 난 이미 충분히 기다렸어. 목구멍까지 올라온 말을 삼키며, 나는 지훈의 얼굴을 노려보았다. 지훈도 예민해져 뾰족하게 치켜 올라간 눈꼬리를 하고선 질세라 내 시선을 맞받아쳤다.

 "그 자식 맞지?"

 지훈은 아니라고 거짓말도 못하고 곤란한 표정으로 이쪽과 저쪽의 눈치를 살피느라 바빴다. 열린 문 틈 새로 내 뒤통수를 쏘아보는 기분 나쁜 시선이 느껴졌다. 눈빛에 묻은 약간의 호기심과 노골적인 경계심까지도.

 드르르륵-

 팽팽한 긴장감을 깨는 진동 소리에 나와 지훈의 시선이 같은 방향으로 움직였다. 거실 테이블 위에 올려둔 지훈의 휴대폰이 긴 진동음을 토하며 제자리에서 뱅글뱅글 돌고 있었다.

 "전화나 받아."

 내 말에도 지훈은 꿈쩍않고 커다란 눈을 깜박이며 조금 누그러진 시선으로 내 얼굴만 쳐다보았다. 무언가를 다짐받고 싶어하는 눈빛이었다.

 "얌전히 있을 거지?"

 내가 무슨 개도 아니고. 퉁명스럽게 대꾸하려다 그냥 짧게 고갤 한 번 끄덕였다. 그제야 지훈은 휴대폰을 쥐고 거실 구석으로 사라졌다. 또 어떤 놈팽이한테 걸려온 전화인지는 몰라도, 지금은 눈앞에 있는 저 망할 자식부터 손봐주는 게 우선이었다. 나는 단기기억상실증에 걸린 사람처럼 방금 전 지훈과 한 약속도 잊고 문이 열린 방 안으로 들어갔다.

 "뭡니까?"

 남자는 침대에 걸터앉아 대뜸 불쾌한 투로 투덜거리듯 물었다. 어떻게 하면 겁을 주어 쫓아낼 수 있을까 생각하던 그때, 남자의 뒤편에 와르르 쏟아져 있는 한 무더기의 콘돔이 눈에 들어왔다. 눈짐작으로 대강 헤아려보니 하루종일 밥 안 먹고 그 짓만 해도 일주일은 쓰고도 남을 양이었다. 보자보자 하니까 진짜. 단순한 찌질이 스토커인 줄 알았더니 질 나쁜 변태 새끼잖아, 이거. 뻔뻔한 낯짝으로 나를 빤히 보는 꼬락서니에 울컥 화가 치밀어, 내 말투는 저절로 시비조가 되었다.

 "그러는 넌 누군데?"
 "7급 공무원이다, 왜."
 "그게 뭔데?"

 진짜로 몰라서 물은 건데 남자는 의외로 그 말에 엄청나게 열이 받은 듯했다. 제 분을 못 이기고 벌떡 일어서자 머리끝이 내 어깨선 근처에서 왔다갔다 했다. 애랑 어른이 싸우는 것 같았다. 덕분에 7급 공무원씨의 꼬라지는 더 우습게 되었다.

 "뭐 이런 또라이 같은 자식이 다 있어? 그러는 넌 뭔데 나한테 반말이야?"
 "사람이 싫다고 하면 그런 줄 알고 포기할 줄도 알아야지."
 "이 새끼가 어디서 건방지게. 너 몇 살이야? 몇 살인데 어른한테 반말이야? 못 배워먹은 새끼 같으니."
 "나이 먹고 배운 사람이면 아무한테나 새끼, 새끼, 해도 돼?"
 "하! 이래서 중국인들은 못써요. 에이, 되바라진 짱깨 새끼."

 그건 7급 공무원의 치명적인 실수였다. 다른 건 다 참았어도 그 말만큼은 참아줄 수가 없었다. 중국인이 아니라 대만인이다. 나는 중국어로 욕설을 씹어 뱉으며 알차게 힘이 실린 주먹으로 왼쪽 턱에 강력한 한 방을 먹였다. 남자는 요란한 소음을 내며 옷장에 몸을 부딪쳤다. 고개를 들어 나를 노려 보는 눈빛엔 말로 다 표현할 수 없는 두려움과 혐오감이 동시에 담겨 있었다.

 "허, 쳤어? 방금 나 쳤어?"
 "더 맞고 싶으면 계속 해봐."

 주먹을 바로 쥐고 한 대 더 때려주려는 그 순간, 열린 방문을 활짝 밀치며 뭐가 쏟아지듯 지훈이 급히 뛰어들어왔다. 생각보다 통화가 빨리 끝난 모양이었다. 나는 머쓱해져 슬그머니 쥐었던 주먹을 허리 밑으로 내렸다.

 "뭐야? 저 사람 왜 저래?"

 지훈은 섣불리 남자에게 다가가지 않고 적당한 거리를 유지한 채 내 얼굴만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나는 주인이 없는 동안 집안을 엉망진창으로 만들어 놓은 강아지처럼 멀뚱하니 허공을 보면서 딴청을 부렸다. 내가 대답이 없자 지훈은 재촉하듯 '응?' 하고 물으며 얼굴을 가까이 들이댔다. 하지만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는 나는 '어?' 하고 시선을 피한 채 멍청한 소리만 낼 뿐이었다.

 "끼리끼리 어울린다고. 짱깨 같은 거랑 놀아나고."

 남자는 분해 죽겠단 목소리로 또 한 번 용서받을 수 없는 말을 내뱉었다. 주먹이 근질거리는 걸 꾹 참고 째려보기만 하자, 남자는 내가 한 풀 꺾였다 생각했는지 눈치도 없이 되는 대로 지껄여댔다. 대개가 외국인을 비하하는 말이었다. 거기까진 어떻게든 참았는데, 남자의 입에서 '더러운 게이 새끼'라는 말이 나왔을 때는 흠씬 두들겨 패주고 싶다는 생각이 머리 꼭대기까지 올라와 폭발 직전에 이르렀다. 달아오른 도화선에 불을 붙인 건 그 다음 말이었다. 에이즈 걸려 뒈져라! 욕이라기보다 저주에 가까운 폭언에, 나는 더 참지 못하고 남자의 허리를 잡아채 바닥에 넘어뜨리고서 그 위로 올라타 마음껏 주먹을 휘둘렀다. 이번에는 지훈도 그런 나를 말리지 않았다.

 "한 번만 더 내 눈에 띄기만 해. 그땐 진짜 죽을 줄 알아."

 남자는 네 발로 기다시피해서 뒤도 안 돌아보고 번개처럼 도망쳤다. 찌질한 스토커에 변태 새끼에 인간 쓰레기 같은 자식. 잘근잘근 욕을 씹어 뱉어도 분이 풀리지 않았다. 도망간 사람 뒤에 대고 부질없이 열을 내다, 머리가 뜨거워지며 앞이 핑 도는 걸 느끼고 자리에 풀썩 주저앉았다. 가슴께를 내려다 보니 남자가 반항하면서 옷을 잡아당긴 탓에 셔츠 단추가 다 뜯어져 있었다. 내가 지금 뭘 하고 있는 건지. 어처구니가 없어 헛웃음만 났다.

 "얌전히 있겠다고 했잖아."

 나무라는 말투였지만 목소리가 부드러워 화가 난 것처럼 들리진 않았다. 나는 누더기가 되어버린 셔츠 구멍에 손가락을 넣었다 뺐다 하면서 불만스레 툴툴거렸다.

 "너도 약속 안 지켰잖아."
 "뭐?"
 "함부로 하지 말라고, 내가 분명히 부탁했었잖아."

 그래, 하고 지훈은 쉽사리 대답하지 못한다. 아직 그만큼 능청스럽지는 못한 탓이다.

 "말했잖아. 말이 안 통하는 인간이라고."
 "그래서, 어디까지 봐줄 셈이었는데?"
 "그만해."
 "고작 저딴 놈이랑 뒹굴려고 나랑 헤어지자고 했어?"

 울어도 받지 않는 전화처럼, 나는 고요하고 격렬하게 진동한다. 너의 눈이 절망을 켰다 슬픔을 끌 때까지. 나를 자주 쓰러뜨렸던 눈빛이다. 나 아닌 다른 남자들을 자주 쓰러뜨렸을 눈빛이다. 침묵 속에 잠긴 너는 여지가 많다. 새하얀 백지가 되어 부디 나를 더럽혀 달라고 애원하고 있는 것만 같다. 그렇게 너는 또 한 장의 너를 낭비한다. 이것이 너의 마지막 페이지인 줄도 모르고.

 "언제까지 이렇게 살 거야?"

 펑, 하고 내 안에서 뭔가가 폭발한 것 같았다. 주먹이 쥐어진 건 그 때문일 것이다. 간신히 아문 이마의 상처가 터질 듯 따끔거렸다.

 "언제까지 내가 구남친처럼 굴게 놔둘 거냐고 묻고 있는 거야."

 굳게 닫힌 입술이 눈치없이 예뻤다. 나는 뭐에 홀린 것처럼 지훈의 옷깃을 잡아당기며 갑작스레 입을 맞췄다. 입술이 닿아도 지훈의 입술은 용도를 잃은 것처럼 좀처럼 열리지가 않았다. 새초롬하게 솟은 입술산을 빨아들이며 혀로 윗입술을 당겨도 마찬가지였다. 밀어내지 않았지만 받아주는 것도 아니었다. 너는 남들에게도 이런 식이었을까. 쉽게 허락하고, 쉽게 내주지 않았을까.

 분했다. 내가 조금 전 그 남자와 동급이라는 게. 나는 커다란 손으로 지훈의 몸을 쓰다듬으며 느슨하게 걸쳐져 있던 겉옷을 어깨 밑으로 벗겨냈다. 하얀 반팔티와 팔목에 걸린 후드 짚업 사이로 드러난 매끄러운 속살에선 향긋한 꽃향기가 배어나왔다. 오랜만에 다시 맡은 몸냄새에 가슴이 먹먹해지며 일시정지 버튼을 누른 것처럼 모든 사고가 정지했다. 나는 빠른 손놀림으로 몇 개 남지 않은 셔츠 단추를 모조리 열었다. 그리곤 두 손으로 지훈의 얼굴을 감싼 채 격렬하게 입술을 빨아들이기 시작했다. 옷을 벗고 계속해 몸을 만지며 키스를 해도 지훈은 반항하지 않고 나를 가만히 내버려두었다.

 쾅쾅쾅-

 못된 손이 슬금슬금 더 깊은 곳으로 내려가려던 그때, 누군가 문을 부술 기세로 현관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우리는 얼음이 된 것처럼 아슬아슬한 자세로 하던 것을 멈추고 고요히 숨만 내리 쉬었다. 박지훈! 박지훈! 쾅쾅쾅, 쾅쾅쾅, 박지훈! 불청객은 참을성이 없는 편이었다. 무시하고 계속할까도 생각했지만 저쪽의 기세를 보니 귀머거리가 아니고서야 무시하기란 불가능한 일이었다. 엷은 한숨이 지훈의 뺨에 부딪쳐 다시금 내 입술로 돌아왔다. 지훈은 줄곧 시선을 아래에 둔 채 아무 말이 없었다. 나는 떨어진 셔츠를 신경질적으로 주워올리고 미적거리며 지훈의 몸에서 떨어져나왔다.

 "내가 나갈게. 아까 그 자식일지도 모르니까."

 오늘따라 손님이 많다고 생각하며, 나는 되는대로 셔츠의 단추를 꿰고 문을 열었다. 그렇게 쫓겨난 게 억울해 식칼이라도 들고 다시 찾아온 게 아닐까 했는데, 뜻밖에도 불청객은 다른 남자였다.

 "누구야, 너."

 이건 또 어떤 쓰레기야. 나지막하게 중국어로 욕을 하자 불청객의 얼굴이 미묘하게 일그러졌다. 중국어를 알아듣는 건가. 그러고 보니 어디서 봤던 얼굴 같았다.

 "이 새끼가."

 곱상한 얼굴과 달리 불청객은 꽤 다혈질이었다. 퍽, 하고 가슴에 묵직한 힘이 실려와 순간 중심을 잃고 뒷걸음질을 쳤다. 그리고 다시 한 번 욕을 하려는 찰나, 왼뺨에 어마어마한 강펀치가 날아와 목이 크게 꺾였다. 어찌나 주먹이 세고 빠른지 하마터면 혀를 깨물 뻔했다. 반격의 의지마저 꺾어버리는 일격이었다. 그리고 얼굴 전체에 불을 지른 듯 굉장한 통증이 밀려왔다. 너무 아파서 얼굴 반쪽이 없어진 것 같았다.

 "배진영!"

 등 뒤에서 날아든 지훈의 목소릴 듣고서야 내 앞에 서 있는 불청객의 얼굴이 낯익었던 이유를 깨닫게 되었다. 그였다. 나와 지훈을 헤어지게 만든 어학당의 불청객, 배진영.

 "관린아, 괜찮아?"

 지훈은 몸을 날려 내게 또 한 번 주먹을 날리려는 진영을 막아냈다. 그리곤 내게 달려와 흉하게 부어오른 얼굴을 이리저리 살폈다. 이게 무슨 짓이야! 지훈은 진짜로 화가 난 목소리로 불청객을 향해 소리쳤다. 달랐다, 지훈은. 7급 공무원이 맞았을 땐 이런 식으로 감싸주지 않았었다. 하지만 내가 7급 공무원을 때렸을 땐 이런 식으로 화를 내지도 않았었다. 누군가의 앞에서 이렇게 감정적으로 변하는 지훈의 모습은 처음이었다. 그래서 알았다. 나와 그 남자는 동급이 아니란 걸. 그리고 나와 불청객도 동급이 아니란 걸.

 얼얼한 뺨 한 쪽을 손바닥으로 감싸고 비틀거리며 겨우 몸을 일으켰다. 방에서 외투를 챙겨 나오자 진영의 앞을 가로막고 선 지훈의 모습이 보였다. 너는 누구에게서 누굴 보호하려 하는 걸까. 서글픈 마음에 지훈의 어깨를 밀치며 문 밖으로 도망치듯 뛰쳐나갔다. 그리곤 뒤도 돌아보지 않고 빠른 걸음으로 무작정 걸었다. 찬바람이 닿은 왼뺨이 찢어질 듯 아팠다. 아파서, 너무 아파서 눈물이 줄줄 흘렀다.

 "관린아!"

 죽어도 질질 우는 꼴을 마지막 모습으로 보여주고 싶진 않았는데. 뒤에서 들려오는 기침 소리에 나도 모르게 걸음을 멈추고 말았다. 돌아보니 짧은 반팔에 맨발에 슬리퍼를 신은 차림으로 지훈이 헉헉대는 것이 보였다. 추위도 많이 타는 주제에 그런 꼴로 따라나와선 사레가 들린 것처럼 발작적으로 기침을 한다.

 "관린...."

 나는 지훈이 아무 말도 할 수 없게 와락 몸을 부딪치며 품 속으로 끌어 안았다. 영원과도 같았던 후회와 미련의 끝에서 되찾은 옛연인의 체온은 한없이 따스하고 부드러워 더 가슴 아팠다. 잡았다. 드디어 너를 잡았는데, 품에 안았는데, 어째서 너는 내 것이 아닌지.

 "미안해."

 볼이 부어서 발음이 우스꽝스럽게 뭉그러졌다. 지훈은 품 안에서 속눈썹을 깜박이며 어? 하고 물었다. 기침은 어느새 멎어 있었다.

 "이젠 내 옷 못 줘. 그러면 안 될 것 같아."

 가슴에 번진 체온의 굴곡으로 나는 지훈이 웃고 있다는 걸 알았다. 지훈의 웃음 포인트는 오늘도 이해불가능이다. 그래도 괜찮다. 웃었으니까. 네가 웃고 있으니까.

 "가."

 차가워진 지훈의 팔뚝을 쓸어내려 한 줌의 온기를 더하며, 나는 마지막이 될 눈맞춤으로 인사를 대신했다. 그만 들어가라는 말에 지훈은 미안함이 가득한 얼굴로 주저하며 품에서 떨어져 나왔다. 그래서 알았다. 네가 돌아갈 곳은 내가 아니라 다른 남자의 품이라는 걸. 그곳이 네가 있을 집이라는 걸.

 드디어 너는 네 집을 찾았구나.

 "그 녀석이 괴롭히면 전화해."

 잘 가라는 그 말을, 이제 정말 안녕이란 그 말을, 나는 고작 그따위로밖에 못한다. 언제나처럼 다가오지도 떠나가지도 않는 지훈을 향해, 나는 팔을 머리 위로 들어 올려 힘껏 흔들고 몸을 돌렸다. 한참을 걸어 아주 작은 점이 될 때까지도 내 뒷모습을 지켜보는 시선이 느껴져, 나는 쉽사리 뒤를 돌아보지 못했다.

 나는 아직 비어 있어. 너를 위해. 언젠가는 돌아올 너를 기다리며.

 오래도록 내 뒷모습을 쫓던 시선이 사라지고 나서야, 나는 눈물이 말라붙은 입술을 달싹여 자그맣게 속삭였다. 아무도 들을 수 없는 곳에서. 아무도 들을 수 없는 소리로. 너에게만은 비밀이었던 그 말. 끝까지 숨기고 싶었던 그 말. 사랑한다는 그 말을.







워너원고에서 청춘드라마 찍는 판윙을 보고서 아 이건 써야대 하며 롬곡파티를 벌였으나

혐생과 게으름의 콜라보로 이제서야 업뎃을 하네요 ㅠㅠ

본래 분홍주의보 속편으로 썼던 거지만 안 읽고 보셔도 내용 이해에는 아무 지장은 없습니다 ㅎㅎ

이걸로 미세하게 판윙 지분을 샀으니 이제 주식이 오르기만 기다리면 되는 거겠죠...? ㅋ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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