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스크림이 흘러내린 것처럼 손가락 사이사이가 끈끈하다. 오목하게 패인 손금을 따라 차오른 땀 때문에 손바닥에선 불쾌한 냄새가 났다. 그 냄새의 한가운데에 SD카드가 있었다. 오늘 아침 사무실에서 가져온 거였다. 나는 손을 쥐었다 폈다 하면서 되찾은 SD카드를 만지작거렸다. 이렇게 작고 납작한 물건으로 내 인생이 완전히 무너질 뻔했다는 게 좀처럼 믿겨지지 않았다. 그렇게 위험한 물건을 지금 내 손 안에 쥐고 있다는 것도 믿기 어렵기는 마찬가지였다.

 지훈이 집으로 찾아왔었다. 저녁 때가 조금 지나서였다. 지훈의 얼굴은 선크림을 잔뜩 바른 것처럼 하얗게 질려 있었다. 그리고 몹시 번들거렸다. 아무리 날이 더웠어도 해가 진 지 오랜데 그만큼 땀을 흘리는 건 정상이 아니었다. 서 있는 모습이 불안해 보여 어깨를 붙잡자 셔츠 위로 축축한 습기가 스며들었다. 나는 바쁘게 지훈의 모습을 훑었다. 이상한 점이 한두 군데가 아니었다. 먼지가 잔뜩 들러붙은 바짓단. 구겨진 셔츠자락. 그리고 가슴 정중앙에 뻥 뚫린 빈 단추구멍 하나.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안 좋은 일이 생겼다는 건 바보라도 알 수 있었다.

 씻고 싶다고 했다. 내게는 그 말이 씻어내고 싶은 게 있다는 뜻으로 들렸다. 묻고 싶은 게 너무나 많았지만 일단은 접어두고 욕조에 물부터 채웠다. 충격과 분노로 손이 덜덜 떨렸지만 참으려 안간힘을 썼다. 지훈이 진정할 수 있게 돕는 게 우선이었다. 지훈은 옷을 입은 채로 욕실 안으로 들어갔다. 문 앞에서 수도 없이 왔다갔다 하다가 참지 못하고 작게 문을 두드렸다. 문고리를 슬쩍 돌리자 무릎을 끌어안고서 욕조에 쭈그리고 앉은 지훈의 모습이 보였다. 물에 잠긴 몸 곳곳에 빨간 손자국이 선명히 찍혀 있었다. 피가 거꾸로 솟는 것 같았다. 어떤 새끼가 이랬냐고 소리치고 싶은 걸 어금니를 꽉 깨물어 참았다. 지훈은 착 가라앉은 얼굴로 이슬이 맺힌 욕실 벽면만 응시했다. 나는 말없이 스펀지에 듬뿍 물을 먹인 후 샤워젤을 묻혀 거품을 냈다. 스펀지로 몸을 쓸자 풍성한 거품이 일어나 나쁜 흔적들을 가려주었다. 지훈은 고분고분하게 내가 하려는 대로 몸을 내주었다.

 "내일 아침에 동영상 원본 찾으러 갈 거예요."

 깨끗해진 몸으로 침대에 앉아 지훈은 그렇게 말했다. 마치 맡겨놓은 물건을 찾으러 가는 사람 같았다. 나는 상스러운 태도로 협박하던 한윤성의 얼굴을 떠올렸다. 그 인간이 미치지 않고서야 그렇게 쉽게 동영상을 내줄 리가 없었다. 뭘 믿고 그런 말을 하는 걸까. 문득 지훈의 몸에 남은 빨간 손자국과 한윤성의 얼굴이 차례로 떠올라 불쾌하게 달라붙었다. 최악의 조합이었다. 나는 믿기지 않는 눈으로 침대 끝에 아슬아슬하게 걸터앉은 지훈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아주 고요한 폭풍을 보는 것 같았다. 단단한 벽 너머 보이지 않는 곳에서 휘몰아치는. 울거나 소리를 지르거나 물건을 던지고 부수지 않아도 그 속이 얼마나 요란할지 생생하게 느껴졌다.

 "형이랑 같이 가."

 지훈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나는 그걸 승낙의 뜻으로 여겼다. 그리고 정말로 다음날 아침 지훈을 따라나섰다.

 아직 해도 뜨거워지지 않은 이른 아침, 지훈이 이끈 곳은 전에 몸 담고 있었다던 보도방이었다. 은밀한 욕망을 사고 팔던 유혹의 공간은 초라한 민낯으로 불청객을 맞이했다. 찌든 내가 풍기는 소파. 담배 꽁초가 산더미처럼 쌓인 재떨이. 다리 한 짝이 망가진 테이블. 전화기와 컴퓨터가 놓인 하나뿐인 책상. 지훈은 그곳을 사무실이라 불렀다. 사무를 보는 곳이라곤 믿기지 않을 정도로 실내가 음침하고 갑갑했다. 사무실 어딘가에 SD카드가 있을 거라며, 지훈은 컴퓨터가 놓인 철제 책상을 뒤지기 시작했다. 대중없이 이곳저곳을 기웃거리다 사장실이라 적힌 방문을 열고 들어갔다. 두어 평이 될까 말까한 아주 좁은 공간이었다. 공간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건 체리색 책상이었다. 미니 캘린더와 탁상용 시계, 여자 나체 모양의 라이터와 재떨이가 놓인 책상을 손바닥으로 스윽 훑어 보았다. 그러자 손끝에 뭔가가 탈칵 걸리는 느낌이 들었다. SD카드였다.

 집으로 돌아오자마자 컴퓨터를 켜고 영상을 확인했다. 한윤성이 보여주었던 동영상 원본이 맞았다. 떨리는 손으로 삭제 버튼을 눌러 파일을 지웠다. 빈 껍데기만 남은 SD카드는 비밀의 무게만큼 가벼워져 있었다. 그래도 여전히 불쾌한 냄새가 흘렀다. 나는 SD카드를 들고 욕실로 향했다. 어제 지훈이 들어 갔던 욕조엔 차가운 물이 찰랑이고 있었다. 더울 때마다 들어가 몸을 식히려고 미리 받아놓은 물이었다. 팔을 뻗어 손을 펴자 고요한 수면 위에 잔잔한 파동을 만들며 SD카드가 가라앉았다.

 내 삶이 망가지는 걸 내버려둘 수도 있었다. 그러는 대신 지훈은 다른 선택을 했다. 자신이 상처 입고 가라앉는 쪽으로. 나를 살린 건 지훈이었다. 그렇다면 내 남은 삶을 지훈에게 바쳐도 괜찮지 않을까. 어차피 그냥 두었다면 너덜너덜해질 인생이었는데.

 욕실 거울에 비친 내 얼굴이 낯설다. 눈빛은 매서웠고 늘 웃고 있느라 내려올 줄 모르던 입꼬리는 딱딱하게 내려가 움직이질 않았다. 화가 났구나 나는. 화를 낼 준비가 되었구나. 깨달음은 파문처럼 메아리치며 마음 속에 번져갔다.






 놀다 가요. 달려드는 손길을 떼어내고 몇 걸음 옆으로 자리를 옮겼다. 유흥업소가 밀집된 거리에서 누군가를 기다리는 일은 생각했던 것보다도 훨씬 더 성가셨다. 젊은 남자라 유혹의 손길이 많은 것도 같았다. 눈이 아프도록 붉은 간판 너머 아침에 지훈과 함께 왔던 사무실 건물이 보였다. 같은 곳이 맞나 싶을 정도로 아침과는 달리 거리 전체에 생기가 넘쳐 흘렀다. 눈이 뻑뻑해 질끈 눈을 감았다 뜨길 반복했다. 몇 시간째 건물 입구만 뚫어져라 쳐다보았지만 기다리는 사람은 도통 나타나질 않고 있었다.

 가진 담배를 모두 태우고도 삼십 분이 더 지난 뒤였다. 의심스러운 검은 자동차 한 대가 건물 앞에 멈춰 섰다. 자동차 앞유리로 운전석에 앉아 휴대폰으로 통화를 하고 있는 남자의 모습이 보였다. 잰걸음으로 차 뒤를 돌아가 건물 앞에 기대어 섰다. 가까운 거리라 남자의 얼굴이 또렷하게 보였다. 한윤성이었다. 에이씨. 불만이 가득한 목소리로 궁시렁대면서 한윤성은 세게 차 문을 닫았다. 그리곤 손가락에 건 열쇠를 뱅뱅 돌리며 내 옆으로 다가왔다. 건물 안으로 들어가려는 그의 어깨를 잡고 완력으로 돌려세웠다.

 "뭐야 이건?"

 인상을 써서 구겨진 얼굴에 냅다 주먹을 날렸다. 정확하게 명중이었다. 충격으로 일그러진 한윤성의 얼굴에 나는 또 한 번 주먹을 먹였다. 두 대를 연달아 때리고 나서야 한 박자 늦게 손가락뼈가 으스러질 것 같은 통증이 찾아왔다.

 "한 번만 더 우리 지훈이 건드렸다간 내가 너 죽여버릴 거야."

 종양처럼 단단하게 곪아가던 말들을 뱉자 속이 뻥 뚫린 것처럼 시원했다. 동시에 흥분한 것처럼 심장이 빠르게 뛰고 아드레날린이 치솟았다. 너, 이.... 한윤성은 더러운 표정으로 나를 쏘아보더니 지지 않고 맞받아쳤다.

 "뭐라는 거야, 이 미친 새끼가."

 너무 가까이에서 날아온 주먹이라 궤도를 알고서도 피할 수가 없었다. 얼굴을 살짝 비껴간 그의 주먹은 눈썹과 귓바퀴 사이를 예리하게 갈랐다. 눈가가 찢어졌는지 순식간에 피가 흘러 앞이 보이지 않았다. 이때다 하고 한윤성은 내 명치에 냅다 주먹을 내리꽂았다. 억 소리가 나더니 순간적으로 숨이 쉬어지질 않았다. 씩씩대는 숨소리와 함께 발길질이 날아들었다. 로우킥을 몇 대 얻어맞고서 오로지 살겠다는 본능으로 그의 다리를 잡고 매달렸다. 균형을 잃고 뒤뚱거리더니 한윤성의 몸이 옆으로 넘어갔다. 하늘이 준 마지막 기회였다. 나는 그의 몸 위로 올라타 마구 주먹을 날렸다. 일을 키우지 않으려면 적당히 때렸어야 했는데 흥분 상태라 얼마나 세게 때리고 있는지도 모르고 죽어라 팼다. 아픈 것도 느껴지지 않았다.

 "경찰 불러, 경찰!"

 누군가 새된 목소리로 경찰에 신고하라며 고함을 질러댔다. 경찰이란 말에 뒤늦게 정신이 들었다. 내 밑에 깔린 한윤성도 피떡이 된 채로 고개를 들었다. 씨발. 어디서 그런 힘이 났는지 한윤성은 내 가슴을 떠밀고 부리나케 골목 안으로 도망쳤다. 나도 허겁지겁 반대 방향으로 자리를 피했다. 생각보다 구경꾼들이 많이 몰려 있어 후드를 뒤집어쓰고 걷다가 빈 택시를 발견하고 잡아탔다.

 "어디로 갈까요?"

 택시 기사는 룸미러로 내 얼굴을 힐끗 훔쳐보더니 병원으로 갈 거냐 물었다. 차창에 비친 꼴만 봐도 여기저기가 붓고 터져 몰골이 말이 아니었다. 나는 피가 굳어서 잘 떠지지 않는 눈을 꿈벅이며 대답을 망설였다. 웃기는 말이지만 지훈이 너무 보고 싶었다. 어물거리다 에라 모르겠다 하고 지훈이 사는 동네 이름을 댔다. 좌석 시트에 몸을 파묻고 멍하니 있다 보니 조금씩 감각들이 살아났다. 아팠다. 아프지 않은 곳이 없었다.

 택시에서 내려 지훈의 집 근처에서 전화를 걸었다. 집 앞이란 말에 지훈은 금방 나오겠다며 전화를 끊었다. 기다리는 일 분 일 초가 너무나도 길게 느껴졌다. 한윤성을 기다리는 일은 싫어도 견딜 만했는데, 지훈을 기다리는 일은 좋은데도 괴로웠다.

 "형!"

 부르는 소리에 돌아보니 헐레벌떡 뛰어오는 지훈의 모습이 보였다. 집에 있다가 급하게 나왔는지 잠들기 직전의 차림이었다. 엉망진창인 얼굴을 하고 나는 빙구처럼 히죽 웃었다. 시력이 좋지 않은 지훈은 닿을 듯이 가까이 다가와서야 크게 입을 벌리고 비명을 삼켰다.

 "얼굴이.... 얼굴이 왜 이래요?"

 부르튼 입술과 찢긴 눈가를 어루만지는 손길이 좋아서, 나는 대답하는 것도 잊고 고장난 것처럼 가만히 있기만 했다. 왜 이래요? 어쩌다 이렇게 된 건데요? 누가 이랬어요? 내가 말을 않자 지훈은 애가 닳아 질문을 퍼부어댔다. 오늘의 박지훈은 레어템이었다. 나보다 말을 많이 하는 모습을 보는 건 처음이었다. 나는 그런 지훈을 피식피식 웃으며 지켜보았다. 사랑스러웠다. 너무나.

 "형 지금 웃음이 나오...."

 혀끝에 걸린 뒷말은 내 입 속으로 삼켜졌다. 갑작스런 입맞춤에 지훈은 허리를 접으며 뒤로 몸을 뺐다. 그런다고 놓아줄 내가 아니었다. 성한 왼팔로 허리를 감고서 벽 쪽으로 지훈을 밀어붙였다. 검은 옷을 입은 것처럼 지훈의 몸 위로 내 그림자가 가지런히 포개어졌다. 다시 입술을 겹치자 더운 숨이 살결 위로 흩어졌다. 나는 게걸스레 혀를 빨고 세게 입술을 물었다. 경계가 흐릿한 지훈의 입술 모양대로 타액이 번져 립글로스를 바른 것처럼 번들거렸다.

 격렬한 키스였다. 터진 입술이 두 배로 부어 올랐지만 후회는 없었다. 나는 손등으로 대충 입가를 문질러 닦고 지훈을 보며 말했다.

 "미안하단 말은 안 할게. 니가 너무 좋다."

 그러니까 우리 끝까지 가보자. 나는 또 한 번 빙구처럼 웃었다. 지훈은 아무 말 없이 상처난 눈썹뼈를 어루만졌다. 나는 그걸 승낙의 뜻으로 여겼다.

 달빛이 고왔다. 영원 같은 밤이었다. 내 삶의 나머지가 지훈의 것이 되던 날이었다.







썼다가 엎고 또 엎고를 반복해가며 정말 어렵사리 작업했던 11편입니다 ㅠㅠ

저는 이번 편의 녤이가 개인적으로 매우 마음에 드네요 ㅎㅎㅎ

앙스트 블뤼테는 총 14화 완결을 예상하고 있습니다.

남은 세 편의 이야기도 따스한 시선으로 끝까지 지켜봐주세요.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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