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각사각. 글씨를 쓴다. 연필심이 종이를 스치며 내는 기분 좋은 소리에 오늘도 필기를 세 바닥이나 했다. 중간중간 낙서도 있고 갑자기 떠오른 생각들을 휘갈겨 쓴 면적이 꽤 되긴 하지만. 뭉툭해진 연필심을 손끝으로 문지르며 얼마나 닳았는지 가늠해본다. 다음 수업 때 좀 더 분발한다면 오늘 안에 연필심을 깎아도 괜찮을 듯 싶었다.

 쓰는 것이 좋았고 쓰는 도구가 연필인 것은 더 좋았다. 중학교에 올라가 친구들이 하나 둘 샤프를 쓰기 시작했을 때도, 고등학교 시절 처음 사귀었던 여자친구가 팬시 코너에서 뭐에 쓰인 듯 색색깔의 볼펜을 사들이던 동안에도, 내 손엔 언제나 연필이 들려 있었다. 마찰에 약하고 지우개라도 한 번 잘못 굴리면 대참사가 일어난다는 게 단점이라면 단점이었지만, 그래도 나는 연필을 포기할 수 없었다. 좋았다. 그 흐릿한 농담(濃淡)과 쉽게 번질 만큼의 무르기가. 잘못 적더라도 깨끗하게 지우면 그만이라는 새침함이. 조심스럽고 겁 많은 성격이면서 겉으론 단단해 보이는 면은 내 성격과도 많이 닮아 있었다.

 우스운 건 그렇게 연필에 집착하면서도 정작 내 손으론 연필을 깎지 못한다는 거였다. 커터칼을 쥐고 있으면 손을 벨까봐 항상 겁이 났다. 이 나이 먹도록 손 베는 게 무서워 연필 하나 못 깎느냐고 한다면 할 말은 없다. 하지만 내가 이렇게까지 된 데엔 다른 누군가의 책임이 더 컸다. 조심조심 서툴게 나무를 한 꺼풀씩 밀어 벗기고 있으면, 톱밥 만들 일 있느냐며 어느 세월에 그걸 다 깎겠느냐고 다정한 손으로 연필을 채어가는 형이 늘 곁에 있었으니까.

 "이리 줘."

 어, 다니엘 형이다! 반가워서 폴짝폴짝 뛰니까 정신 사납다고 가만히 좀 있으라며 엄마처럼 잔소리를 한다. 방금 수업이 끝났는지 전공 서적이랑 필기노트가 펼쳐진 채로 한쪽 팔에 쏟아질 듯 들려 있다. 수업 듣다 온 거야? 묻는 말엔 대답도 않고 방금 내가 삼각형 모양으로 깎아 놓은 연필심을 보더니 흉기로 쓸 거냐며 쯧쯧 혀를 찬다.

 "어쩔래? 나 없으면."

 슥삭슥삭. 몇 번의 칼질로 결이 매끄러워진다. 형이 연필을 깎는 소리를 듣는 건 연필심이 스치는 소리만큼이나 좋았다. 풀잎을 쓸고 가는 바람소리처럼, 나도 모르게 가만히 귀를 기울이게 되는 좋은 질감의 소리.

 "공강이야?"
 "아니."

 쉬는 시간 십 분을 연필 깎는 데에 몽땅 바치고도 뭐가 좋은지 연신 웃는 얼굴이다. 지나가던 사람들이 쭈그려 앉아 연필을 세공하는 형의 모습을 힐끔거렸다.

 "너 연필 깎아달라고 해서 왔지."

 다 됐다, 하며 형은 예쁘게 깎인 연필을 내밀었다. 다니엘 형이 깎은 연필엔 다른 사람들과는 확실히 구별되는 특별함이 있었다. 연필심이 길게 나오도록 나무 부분만 깎는데도 튼튼해서 잘 부러지지 않고 모양이 예뻤다. 그리고 굉장히 맨질맨질했다. 연필깎기 같은 걸로 깎는 거랑은 차원이 달랐다.

 "예쁘다!"

 좋냐? 묻는 소리가 삐딱한 듯 다정했다. 응, 하고 헤벌쭉 웃자 가볍게 머리칼을 헝클어뜨린다. 늦었다. 시간을 확인하더니 출석체크 못하면 큰일이라며 주섬주섬 책을 챙겨 일어선다. 바쁜 형과 다르게 나는 오늘 할 일이 없었다.

 "이따 저녁 같이 먹을래?"
 "나 약속 있어."
 "누구랑?"
 "몰라."

 강의실까지 뛰어갈 준비를 완벽하게 마치곤 다시 한 번 시계를 본다. 수업 시작 3분 전이었다.

 "아직 이름을 몰라. 소개팅이거든."

 나 간다. 형은 크게 손을 흔들며 뛰어갔다. 연필을 꼭 쥐고 있어서 마주 손을 흔들어 줄 수가 없었다.

 "저녁 맛있게 먹어, 지훈아!"

 뛰어가는 뒷모습이 왠지 모르게 서운해서, 연필 하나쯤은 흉기로 만들어도 괜찮겠단 생각이 들었다.





 "가만히 좀 있어봐."

 어떻게 된 게 이 녀석은 잠시도 가만히 있지를 못한다. 꼼지락꼼지락 꾸물럭꾸물럭. 다리를 꼬았다가 내렸다가 팔짱을 꼈다가 풀었다가 턱을 괴었다가 말았다가. 짜증이 나서 꽥 소릴 지르자 그제서야 알았다며 등을 꼿꼿하게 세우고 자세를 잡는다.

 "나 예쁘게 그리고 있는 거 맞지?"
 "닥쳐라, 좀. 입술 그리고 있는데."

 입술이래, 흐흐. 웃는 모습이 병신같다. 한 대 때려주려다 지우개를 던지니 그걸 또 잽싸게 피한다. 얄미울 정도로 재빠른 놈이다.

 "근데 웬일이야? 니가 밥을 다 사고."

 방금 얘기한 걸 금세 잊곤 바닐라 프라푸치노를 들고선 쪽쪽 소리가 나게 빨아댄다. 어깨를 그리던 참이었는데. 아, 망했다. 그냥 이 그림은 버리는 셈 쳐야겠다.

 "그동안은 니가 샀잖아."
 "그거야 그렇지만."
 "커피도 니가 샀잖아."
 "그건 니가 그림 그려준대서 산 거고."
 "제발 움직이지 좀 마라. 지우개, 지우개 어디 갔지?"

 지우개, 지우개. 과장된 몸짓으로 내 말투를 따라하는 모습까지 완벽한 초딩이다. 나 안 해! 참다 못해 스케치북을 홱 덮고 분노의 포크질로 체리 포레누아를 입 안에 넣었다. 이 와중에 맛있긴 되게 맛있다. 사르르 녹는 달콤한 맛에 기분이 스르르 풀리는 것만 같다.

 "미안하다. 이번엔 진짜 가만히 있을게."

 바닥에 떨어진 지우개를 슬쩍 주워 주며 미안하다고 싹싹 비는 모습을 보니 화가 누그러진다. 박우진은 이게 문제다. 짓궂을 땐 과격하고, 사과할 땐 상냥하다. 도저히 캐릭터 파악이 안 되는 녀석이다.

 우진이와 친해지게 된 건 교양 수업 때문이었다. 수업을 같이 들을 사람이 없는지 첫날 혼자 외롭게 앉아 있는 걸 보고 내가 먼저 '나도 혼잔데 같이 듣자'고 치근덕댔던 게 실수였다. 처음엔 낯을 좀 가리는 것 같더니, 친해지고 나선 자꾸 툭툭 건드리고 말도 험해져서 속으로 엄청 후회했었다. 그때쯤부터 나는 우진을 이름보단 '야', '너', '이 자식', '이 XX' 같은 호칭으로 더 자주 부르게 되었다.

 "오늘은 다니엘 형 안 만나?"
 "응."

 못 이기는 척 지우개를 받아 들고 스케치북을 열었다. 일부러 초상화를 그려주겠다고 자청하기까지 했는데 열심히 그려도 연필심은 그대로인 것 같다. 빨리 닳아야 또 깎아달라고 조를 텐데. 역시 4B를 쓸 걸 그랬나. 연필 끝을 보니 한숨만 난다.

 "왜? 약속 있대?"
 "소개팅 있대."
 "누구랑?"
 "내가 어떻게 알아. 팔 좀 내려봐."
 "난 아는데."

 뭐? 손가락을 그리다 삑 연필이 미끄러지는 바람에 엄지가 3m가 되었다. 그림에 제목을 달아줘야 할 것 같다. 엄지왕 박우진.

 "우리 과 선배거든. 관심 있어 하던데."
 "너네 과 선배였어?"

 바닥까지 닿은 엄지를 지우고 지우개 가루를 살살 털어내며 속으로 생각했다. 근데 왜 나한테 말 안 했지. 아, 참. 다니엘 형은 우진이를 모르지. 생각해 보니 이상한 일이다. 다니엘 형은 우진이를 모르는데 우진이는 다니엘 형을 알고 있다는 거.

 "이뻐?"
 "응?"
 "선배. 이쁘냐고."
 "응."

 꽤 명쾌한 대답이었다. 그래? 별 뜻 없이 한 말인데 이상하게 매가리 없게 들린다.

 "더 궁금한 건 없어?"
 "없는데."

 다 됐다. 완성된 그림에 '박지훈' 하고 작가 싸인까지 넣으니 꽤 그럴싸했다. 의자에 한 시간 넘게 엉덩이를 붙이고 있기가 괴로웠던지, 녀석은 온갖 호들갑을 떨며 내 옆으로 달려왔다.

 "야, 이거 나 맞아?"
 "왜? 똑같이 생겼잖아."
 "못생겼잖아. 표정은 또 왜 이래?"

 우진은 그림을 보자마자 있는 대로 툴툴거렸다. 스케치북을 쭈욱 찢어 우진의 품에 던지고 연필과 지우개를 챙겨 일어났다. 어쨌든 한 번은 그려봤으니 소원은 이뤘다. 그림은 맘에 안 들면 버리든지 하겠지.

 "커피 땡큐."
 "야, 어디 가!"
 "집."

 연습은 끝났다. HB는 그림용으론 역시 별로였다. 집에 돌아가는 길에 4B를 하나 살까 보다. 깎여 있지 않은 걸로. 그럼 또 깎아 달랠 수 있으니까.

 이렇게 또 한 자루의 연필이 늘어난다.





 시원한 바람이 살랑 머리칼을 스치고 지나간다. 남들은 불금이라면서 수업도 안 넣고 심지어는 있는 수업도 째고 놀러다니는데, 도저히 안 들을 수 없는 전공 필수가 연강으로 3시간이나 있어서 어쩔 수 없이 학교에 나왔다. 밤을 샜더니 너무 졸려서 계속 조는 바람에 수업 내용이 뭐였는진 하나도 기억이 나질 않았다. 길게 하품을 하면서 휴대폰을 꺼내 괜히 대화창을 켰다가 껐다가 했다. 사실 오늘 학교에 나올 수밖에 없었던 진짜 이유는 따로 있었다.

 "어이, 지훈이."

 시원시원하게 뻗은 긴 팔이 뒤에서 다가와 동그란 정수리를 쓰다듬는다. 오늘도 부랴부랴 달려왔는지 미처 가방에 집어 넣지 못한 전공서적과 필기 노트가 한쪽 팔에 엉성하게 걸려 있다. 따뜻한 손바닥의 체열이 좋은 느낌을 남기고 바람결에 흩어진다.

 "눈이 왜 이렇게 빨개? 잠 못 잤어?"
 "응."
 "어쩐지. 새벽에 톡 날라올 때 알아봤다."

 그게 뭐어. 볼멘소리를 내자 손을 내밀며 연필, 하고 말한다. 새벽 3시에 연필 깎아달라 그랬다고 흉보는 거야 뭐야. 툴툴거리며 필통을 뒤적거려 4B 연필을 꺼냈다. 어제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근처 문방구에서 산 새 연필이었다. 막대처럼 생긴 기다란 4B 연필을 보더니, 형은 기가 차다는 듯 헛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넌 대체 연필이 몇 자루냐?"
 "몇 개 안 된다, 뭐."
 "애들처럼 연필이나 좋아하고."

 깎아주겠다고 할 땐 언제고 오늘따라 괜히 트집만 잡는다. 맘 같아선 그럴 거면 관두라고 하고 싶은데 그랬다간 진짜로 관둘까봐 참았다. 슥삭슥삭. 은근한 마찰음이 좋다. 칼날과 나뭇결이 스치며 만드는 노랫소리 같다. 나무가 부드러워 그런지 속삭이는 소리 같기도 하다. 부드럽고 간질간질한. 그건 한 사람만이 만들 수 있는 소리였다. 다른 사람의 연필 깎는 소리는 그렇지 않았다. 그래서 듣고 있으면 편안해진다. 그 소리가 들리는 곳엔 형이 있다는 뜻이기도 하니까.

 "그것도 줘."
 "어떤 거?"
 "그거. 토끼 그려진 거. 깎아준 지 오래 된 거 같은데."
 "형이 사준 거?"
 "그래."

 핑크색 바탕에 총총총 토끼 세 마리가 그려진 깜찍한 아동용 연필은 형이 사준 선물이었다. 네 생각이 나서 샀다며. 생일도 기념일도 아무 날도 아닌데 선물을 받은 건 그게 처음이었다. 달랑 세 자루밖에 들어 있지 않아, 닳아 없어질까 쓰지도 못하고 가지고만 다녔다. 그래도 늘 가지고는 다녔다. 형이 준 선물이니까.

 "이거 다 쓰면 또 사줄 거야?"
 "그거 맘에 들어?"
 "응."
 "그래. 또 사줄게."

 금세 연필 두 자루를 슥슥 깎고는 만족스러운 듯 이리저리 돌려보더니 자, 하며 내민다. 반듯하게 깎인 모양이 꼭 형의 성격을 보여주는 것 같아 신기했다. 나는 마음이 삐뚤어서 잘 못 깎는 건가. 그런 거라면 끝까지 못되게 살아야겠다고 말도 안 되는 생각을 잠시 했다.

 "형, 나 배고파."
 "점심 안 먹었어?"
 "먹었는데 배고파."

 너도 참. 형은 시계를 힐끗 보더니 아직 네 시밖에 안 됐다며 날 먹보라고 놀려대기 시작했다. 저번엔 볼이 통통해서 귀엽다고 했으면서.

 "같이 저녁 먹으면 안 돼?"
 "어... 지금?"

 곤란한 얼굴을 보니 괜히 마음이 덜컹했다. 웬만해선 내 부탁을 잘 거절하지 않는 형인데. 덩달아 우물쭈물 망설이다 조심스레 눈치를 보며 물었다.

 "약속 있어?"

 쉽게 대답이 나오지 않는다. 형은 사람들의 부탁을 잘 거절하지 못하는 성격이었다. 그런 형이 거절보다 더 못하는 게 거짓말이었다. 보통 이렇게 말이 없으면 그건 그냥 안 된다는 뜻이었다. 약속이 있구나. 괜스레 시무룩해진다.

 "아니야, 약속 없어."

 형은 아니라고 고개를 털며 휴대폰을 꺼내 바쁘게 뭔가를 눌러대기 시작했다. 약속 없냐고 물었지 있는 약속 없애란 뜻은 아니었는데. 가끔 형은 지나치게 친절해서 사람을 미안해지게 만든다.

 "뭐 먹고 싶은데?"
 "맛있는 거."

 넌 다 맛있다 그러잖아. 볼을 쿡 찔러 누르곤 농담, 농담, 하는데 왠지 농담 같지만은 않아서 볼이 부었다. 가자, 맛있는 거 먹으러. 병 주고 약 주려는지 형은 웃으며 앞장서 걸었다. 내가 진짜 앤 줄 아나. 그러면서 나도 모르게 형에게 손을 잡혀 졸졸 끌려갔다.

 "진짜로 뭐가 먹고 싶은데?"
 "음... 떡볶이."
 "맛있는 거 사달라더니 고작 떡볶이야?"
 "사주는 거 말고."

 밥집이 많은 학교 정문 전철역 방향으로 걸어가던 형은 걸음을 멈추고 에? 하며 되물었다. 그러니까 그쪽이 아니라고. 나는 활짝 웃으며 반대 방향으로 형의 손을 끌어당겼다.

 "가자."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고 형은 긴 다리를 휘적거리며 당기는 대로 끌려왔다. 그 모습이 귀여워서 피식 웃음이 났다.

 투명한 햇살이 질투라도 하듯이 다닥다닥 얼굴 위로 쏟아져 내렸다.





 마트에서 신나게 장을 보고 입에는 아이스크림을 하나씩 물고서 집으로 돌아왔다. 도착지는 형이 사는 자취방이었다. 대학생 자취방이 다 그렇듯 비좁은 방 안엔 없는 세간이 많아 어딘지 모르게 부실한 느낌이 들었다. 그래도 정리만은 깔끔하게 잘 되어 있었다. 책상 위의 작고 인형들이랄지 반듯하게 개어놓은 세탁물과 침구에서 형의 손길이 느껴졌다. 내가 선물한 폭신폭신한 어피치 인형도 베개 옆에 얌전히 자릴 잡고 앉아 있었다.

 "금방 해줄게. 조금만 있어."

 배고프다고 징징댔더니 마음이 급해졌는지 형은 부산스럽게 식사 준비를 하기 시작했다. 형이 요리 솜씨가 좋다는 건 이미 알고 있었다. 예전에 한 번 (연필 깎아주러) 집에 놀러왔을 때, 방치된 부엌에 들어가 아주 맛있는 김치볶음밥을 뚝딱 만들어내는 걸 봤으니까. 내가 하면 다 으스러지는 달걀 프라이도 형이 만들면 동그랗고 예쁘게 모양이 나왔다. 형은 마술사였다. 손만 갖다 대면 무엇이든 예쁘게 변했다.

 "뭐 도와줄까?"

 가만히 있기 심심해서 계속 부엌을 들락날락했더니 됐다며 가서 편하게 있으라고 그런다. 무뚝뚝한 사투리 끝에는 고맙다며 자상하게 덧붙이는 것도 잊지 않는다. 하긴 돕겠다고 나서봐야 방해만 될 게 뻔했다. 방구석에서 인형을 조물락거리며 놀다 보니 얼마 지나지 않아 아주 맛있는 냄새가 내가 있는 곳까지 솔솔 풍겨왔다.

 "우와, 맛있겠다!"

 발딱 일어서서 쪼르르 달려가 보글보글 끓고 있는 프라이팬 속을 들여다 보았다. 맛있는 냄새에 벌써부터 침이 고였다. 위험하니까 저리 가라. 형은 손을 휘휘 내저으며 가스불을 껐다. 밥상도 없어서 바닥에 신문지 한 장 깔아놓고 전공 서적 위에 프라이팬을 올려야 했지만, 그런 건 아무래도 좋았다. 나는 입 안 가득 떡볶이를 물고선 전투적으로 씹어대기 시작했다.

 "천천히 먹어라. 입 다 데겠다."

 형은 차가운 얼음물을 한 잔 옆에 놓아주곤 '안 매워?' 하고 물었다. 내가 매운 걸 못 먹는 걸 알고 묻는 눈치였다. 먹느라 대답할 새도 없어서 고개만 도리도리 저었다.

 "잘 먹었습니다!"

 큰 소리로 인사하고 그릇과 수저를 프라이팬 안에 포개어 개수대로 가져갔다. 설거지 정도는 하고 싶었는데, 형은 그마저도 못하게 싱크대 앞을 가로막고는 등을 떠밀었다. 손님은 원래 그런 거 하는 게 아니라나 뭐라나. 우리 집에선 설거지까지 잘만 했으면서. 자기 멋대로 말을 바꾼다.

 배부르게 먹고 난 뒤라 그런지 몸이 나른해지고 하품이 절로 났다. 좁은 자취방에선 남자 둘이 딱히 할 수 있을 만한 일이 없었다. 묘하게 어색한 분위기 속에 어떤 말이라도 해야겠다는 이상한 의무감이 들어, 나는 생각나는 대로 말을 뱉었다.

 "그건 어땠어?"
 "뭐가?"
 "어제 소개팅 말야."
 "그냥 그랬지, 뭐."

 그랬구나. 고갤 끄덕이며 어제 우진이와 나누었던 대화를 떠올렸다. 형에게 관심이 있다던 우진이의 과 선배. 이쁘냐는 말에 응, 하던 선명한 목소리. 하지만 그건 우진이의 생각이지 다니엘 형의 생각은 아니었다.

 "안 예뻐?"
 "예쁘긴 한데 좀...."
 "형 타입이 아니야?"
 "그런 것도 있고."

 어째 묻는 것마다 뭐 하나 분명하게 대답을 해주질 않는다. 그 여자는 형 좋대? 말도 안 되는 질문을 던지려는 순간 고개를 갸웃하더니 형이 먼저 선수를 쳤다.

 "근데 뭘 그렇게 꼬치꼬치 묻냐, 너."
 "왜? 물어보면 안 돼?"
 "그게 그렇게 궁금해?"
 "아니, 하나도 안 궁금하다 뭐. 말하기 싫음 말아."

 더 캐묻는 것도 이상할 것 같아서 토라진 척 등을 돌려 이불에 얼굴을 파묻었다. 궁금하면 안 되는 건가. 대답 좀 해주면 큰일이라도 나나. 엎어져서 궁시렁대고 있으니 다시 하품이 나면서 솔솔 졸음이 밀려왔다.

 "지훈아."

 나지막한 목소리가 차분히 귓가에 흘러든다. 응...? 대답을 하고 싶은데 잠결이라 생각처럼 목소리가 나와주질 않는다. 듣기 좋은 형의 목소리 때문에 다른 곳은 이미 잠들었어도 한쪽 귀의 감각만은 아직 열려 있었다.

 "지훈아."
 ".....응?"
 "형이랑 사귈까?"

 몽롱해진 감각을 날카롭게 찌르는 송곳 같은 한 마디에 번쩍 눈이 떠졌다. 다행히 벽을 보고 누워 있어서 형은 내가 잠이 깬 걸 모르는 것 같았다. 나는 아무것도 못 들은 척 다시 눈을 감았다.

 "몰라아.... 졸려어."

 잠투성을 하듯 베개에 얼굴을 비비고 동그랗게 몸을 말아도 붉어진 얼굴은 감출 수가 없었다. 내가 방금 뭘 들은 거지. 뭐라고 말한 거지. 졸려서 정신이 없는 와중에 그런 말을 들으니 무엇 하나 제대로 생각할 수가 없다. 점점 크게 뛰는 가슴을 어쩌지 못하고 뻗뻗하게 누워 있는데 형광등 때문에 밝았던 시야에 낮은 그늘이 졌다. 그리고 한쪽 뺨에 더운 바람이 와 닿았다. 사람의 체온과 비슷한 온도의 바람은 규칙적인 간격으로 붉어진 뺨을 간질였다. 알 수 있었다. 눈을 뜨면 그 숨결에 부딪칠 거라는 걸. 심장이 뛰는 소리가 몸을 뚫고 바깥에까지 들릴 것만 같았다. 나는 끝내 감은 눈을 뜨지 못했다.

 "....잘 자라."

 더운 바람도 옅은 그늘도 천천히 조금씩 멀어져 갔다. 형은 잘 자란 말과 함께 얇은 이불을 덮어주고 불을 껐다. 아무 일도 없었던 듯 고요한 정적이 찾아왔다. 나는 계속 잠든 척을 하다 정말로 잠이 들어버렸다.

 오랜 시간 망설였을 형의 고백도 그렇게 잠이 들어버렸다.





 "야, 너 톡 왔어."

 공기가 잔뜩 섞인 소리로 속삭이며 우진이는 팔꿈치를 세워 옆구리를 툭툭 찔러댔다. 진짜 무지하게 성가신 녀석이다. 우진이 보지 못하게 휴대폰을 책상 반대편으로 옮겼다. 무음으로 해놔서 톡이 온 걸 몰랐다. 하긴 알았대도 크게 달라지는 건 없었을 거다.

 부드럽게 미끄러지듯 연필심을 굴려 물결치는 머리칼을 한 올 한 올 정성스럽게 그린다. 눈앞에 없어도 보였다. 머리칼이 흔들리는 모양과 곧은 목선과 넓은 어깨가. 슥슥 스케치를 하다 슬쩍 교수의 눈치를 보곤 휴대폰을 확인했다. 우진이 말대로 톡이 여러 개 도착해 있었다.

 - 지훈이, 밥 먹었나?
 - 지훈이, 연필 깎아줄까?
 - 지훈이, 저녁에 약속 있나?
 - 지훈이, 어디 아프나?

 온통 지훈, 지훈, 지훈이다. 그리고 온통 물음표뿐이었다. 바보. 소리나지 않게 중얼거리고 휴대폰을 엎었다. 톡을 확인하고 나니 오히려 더 후회가 됐다. 차라리 보지 말 걸. 읽고도 답장을 안 하면 이상해 보일 것 같기도 하고. 이젠 하다 하다 별 걱정을 다 하고 있다. 내가 지금 뭘 하고 있는 건지. 체한 것처럼 가슴이 꽉 막히고 답답해 그냥 한숨만 난다.

 "왜 답 안 보내?"
 "아오 씨, 너 진짜...."

 목소리가 너무 컸는지 앞자리에 앉은 여학생이 날 선 각도로 뒤를 돌아보았다. 날카로운 눈빛에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우진이와 나는 입을 꾹 다물고 얌전히 아래로 시선을 떨궜다. 정말 도움 안 되는 녀석이다. 일부러 딴 짓 하려고 맘 먹고 맨 뒷자리에 앉았더니 쪼르르 따라와서 계속 참견하고 힐끔거리고.

 "이거 그 형이야?"

 대꾸하기 싫어서 가만히 있었더니 아예 관람모드로 머리통을 받치고 뚫어져라 쳐다본다. 작은 스케치북에 담긴 다니엘 형의 얼굴은 이것이 여섯 번째였다. 어젯밤에 거의 완성 직전까지 그린 걸 과감하게 찢어버린 게 아직까지 후회가 되었다. 꽤 닮았다고 생각했는데, 그려놓고 보니 따스함이 느껴지지 않아서 이건 다니엘 형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버렸다. 종이 다섯 장을 낭비하는 동안 닳아 없앤 연필도 한두 자루가 아니었다.

 "잘생겼다."

 그치? 뭉툭해진 몽당연필을 필통에 넣고 하나 남은 연필을 꺼냈다. 심이 멀쩡한 건 이게 마지막이었다.

 "내 얼굴은 원숭이처럼 그려주더니."
 "그렇게 생겼잖아."

 우이씨. 우진이는 억울하다는 듯 눈썹을 꿈틀대며 입술을 찌그러뜨렸다. 인상 쓰니까 더 못생겨 보인다. 이 정도는 되어야 미남이지. 그림 속 얼굴이 아련하다. 닮아서 더 그런 것 같았다.

 "근데 왜 답을 안 보내?"
 "몰라. 모른다고."

 왜 다들 나에게 묻기만 하는 걸까. 성을 내고 돌아앉으니 그래도 눈치는 있어서 더 귀찮게 굴지 않는다. 형에게도 이만큼의 눈치만 있었다면, 그랬다면 좋았을 텐데.

 연필을 깎아달라고 떼 쓰는 것도, 밥 먹자고 조르는 것도, 늘 나의 몫이었단 걸 형은 알까. 한 번쯤은 묻지만 말고 그냥 말해버려도 좋을 텐데. 그것이 뭐가 됐든 하자, 하고. 연필 깎자, 밥 먹자, 영화 보자, 놀러 가자, 술 마시자.....

 형이랑 사귀자, 하고.

 그럼 더 일찍 알았을 텐데. 나도 잘 모르고 있던 내 맘을. 막연하기만 했던 두근거림을.

 여운처럼 남은 미련에 엎었던 휴대폰을 바로 놓고 한참을 쳐다보았다. 수업이 끝날 때까지. 점심시간이 지나고 그 다음 수업이 시작될 때까지.

 아무리 기다려도 형의 마음은 날아오지 않았다.





 다 됐다.

 꼬박 이틀이 더 걸려 그림을 완성했다. 연필을 놓자마자 처음 한 말이 형의 말버릇과 닮아 있어 공연히 씁쓸한 웃음이 났다. 혹시 지문이라도 찍힐까, 번지거나 지워지기라도 할까, 조심조심 종잇장 끄트머리를 잡고 그림을 뜯었다. 다시 보니 전혀 안 닮은 것 같기도 하고 실물보다 못난 것 같기도 하다. 형이 좋아해줄까. 서툰 기대감에 웃고 있는 형의 얼굴을 상상하고 이유없이 휴대폰을 들춰보다 새카맣게 물든 유리창을 열었다. 그림 그린다고 방 안에만 처박혀 있었더니 지금이 며칠인지 몇 시인지 날씨가 어떤지도 전혀 알지 못했다.

 비가 온다.

 왜 하필.... 한껏 들떴던 마음이 와르르 무너져내린다. 이거 얼른 보여줘야 하는데. 빨리 주고 싶은데. 지나간 일주일이 아까워서라도 더는 지체할 수 없었다. 고민하다 형에게 톡을 보냈다. 어제 전화를 안 받았더니 형은 그 뒤로 연락을 하지 않았다. 무시하려고 그런 게 아니라 전화를 받기가 겁이 나 그랬다. 아직 준비가 안 되어 있다고 생각했다. 적어도 그림을 다 그리기 전까지는 어떤 물음에도 대답할 수가 없을 것 같아서. 그래서 그랬을 뿐인데.

 - 연필 깎아줘.

 조급증에 걸린 사람처럼 3초마다 한 번씩 대화창을 들여다 보고 또 보고 또 보고 했다. 하지만 선명하게 찍힌 숫자 1은 좀처럼 사라지질 않았다. 눈빛으로 지져버릴 기세로 쏘아보고 노려봐도 변함이 없었다. 그렇게 30분을 기다리다 안 되겠다 하고 옷을 챙겨 입었다. 연필 깎아 달라고 할 때마다 매번 달려와주는 건 형이었으니까, 오늘은 내가 형에게 갈 차례였다. 그 정도 각오는 되어 있었다.

 젖을까봐 비닐 안에 그림을 넣고 몇 번이나 랩을 돌려 감았다. 구겨지지 않게 조심스레 품에 안고 심이 닳은 연필 자루들을 외투 주머니에 쑤셔 넣었다. 커다란 우산을 받치고 걸을 때마다 주머니 안에서 달그락달그락 경쾌한 소리가 들렸다. 기억에 의존해 형이 사는 자취방 근처까지 오긴 했는데, 골목 안으로 들어가니 여기가 저기 같고 저기가 여기 같고 막 헷갈리기 시작했다. 비가 오는데다 밤이라 캄캄해서 도무지 어디가 어딘지 구분이 안 갔다. 할 수 없이 형에게 전화를 걸었다. 내 전화는 안 받은 적이 없는데, 한참 신호가 갈 때까지도 형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아 덜컥 가슴이 내려앉았다. 나는 멋대로 형의 전화를 무시했으면서. 내 전화를 안 받을 수도 있을 거란 생각은 한 번도 못 해봤다.

 - 여보세요.
 "형, 나 지금 형네 집 앞에 왔어."

 겨우 전화가 연결되자마자 나는 마구 말을 쏟아냈다. 왔는데, 집 앞인 것 같은데, 어딘지 잘 모르겠어. 앞뒤가 하나도 맞지 않는 소릴 하는데도 형은 차분히 내 말을 들어주었다. 그래서, 잘 모르겠는데, 형이 나와주면 안 돼? 말해놓고도 스스로가 너무 병신 같아서 죽고 싶었다. 형은 잠시 머뭇거리더니 '그게....' 하면서 꺼림칙하게 뜸을 들였다.

 - 형 지금 못 나가.
 "왜?"
 - 집에 손님 와 있어.

 말문이 탁 막혀서 어떤 말도 할 수가 없었다. 형이 안 된다고 말하는 건 처음이었다. 사소한 충격에 세상이 무너지는 기분이었다. 시간이 정지한 것 같았다. 지구가 자전을 멈추고, 빗방울은 공중에 서고, 가슴 속 설레임은 멎어버렸다. 멍하니 빗속에 선 채 나는 그렇게 있었다. 무엇도 할 수 없어서 그냥 있었다. 지훈아? 형이 부르는 소리가 들렸지만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무너진 건 세상이 아니라 나인지도 몰랐다.

 - 잠깐만 있어. 금방 나갈게.

 생각이 달라졌는지 형은 금세 말을 바꿔 집 앞으로 나오겠다며 전화를 끊었다. 그리고 정말 1분도 되지 않아 가로등 밑으로 달려나왔다. 우산도 들지 않고 편안한 차림으로 슬리퍼를 끌고서. 오랜만에 보는 얼굴이라 반가울 줄 알았는데, 어딘지 모르게 어두운 표정에 마음이 서늘했다.

 "다 젖잖아."

 형은 내가 든 우산을 빼앗아 들고 손등으로 빗물이 묻은 어깨를 털어주었다. 우산이 비스듬히 기울어 옷이 젖고 있는 것도 모르고 있었다. 닿을 듯이 가까운 거리에 다시금 가슴이 뛰었다. 두근대는 소리를 들키지 않으려 나는 품에 든 그림을 꼭 끌어안았다.

 "연필.... 깎아줘."

 입 밖으로 기어나온 개미 같은 소리가 옴폭 패인 형의 가슴골에 부딪친다. 차마 얼굴을 볼 수 없어 고개를 떨궜다. 나는 이미 형의 대답을 알고 있었다.

 "지금은 안 돼."
 "왜?"

 형은 곤란한 표정으로 쉽사리 말을 잇지 못했다. 그 모습을 보니 엉뚱하게 오기가 생겼다.

 "깎아줘, 지금."

 나는 주머니에서 닳은 연필 한 움큼을 꺼내 주먹 가득 말아쥐고 폭탄처럼 내밀었다. 이제 남은 연필도 없단 말야. 억지를 부리며 떼를 쓰자 형은 달래듯 어깨를 두드렸다.

 "놓고 가, 그럼. 형이 깎아서 갖다줄게."
 "안 돼. 지금 깎아줘."
 "지훈아."

 곤란한 표정을 짓는 형의 어깨 너머로 자그마한 자취방 창문에 불이 켜져 있는 게 보였다. 창가를 어슬렁거리는 가느다란 누군가의 실루엣도. 일렁이는 그림자를 씩씩대며 노려보다 부아가 치밀어 고래고래 악을 썼다.

 "누구야? 그 사람이야? 소개팅했다는 그 사람이냐고!"

 나는 내가 뭘 원하는지도 모르면서 감정에 이끌려 못나게 발버둥을 쳤다. 그 와중에도 침착하기만 한 형이 미웠다. 그냥 미웠다. 뭐가 미운지도 모르면서 미웠다. 전부 다.

 "됐어, 다 필요없어."

 손에 쥔 연필들과 고이 품고 있던 그림까지 빗물이 고인 길바닥에 내동댕이치고 도망치듯 뛰었다. 뒤에서 '지훈아!' 하고 부르는 소리가 들렸지만 돌아보지 않았다. 간절히 형이 잡아주길 원했으면서도, 결코 붙잡을 수 없을 만큼의 빠르기로 뛰었다. 잡아주었으면 좋겠지만 혹시라도 안 잡을지 모르니까. 나는 그만큼이나 엉망진창에 제멋대로였고 모순투성이었다.

 거짓말. 거짓말쟁이.

 뛰는 내내 빗물인지 눈물인지 모를 것이 끊임없이 얼굴을 적셨다.






 빈 손을 가만히 오므렸다 편다. 손가락을 하나씩 구부려 없는 것을 쥐었다가 푸스스 힘을 풀어 손목을 떨어뜨린다. 마땅히 있어야 할 것이 그 자리에 없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건 결코 쉽지 않은 일이었다. 더는 없었다. 연필도, 연필을 깎는 소리도.

 멍하니 천장을 보고 누웠다가 목이 말라 몸을 일으켰다. 답답한 공기를 환기하려 창을 열자 맑게 개인 하늘빛이 방 안으로 쏟아져 들어온다. 서글프도록 청량한 하늘이었다. 나는 목이 마른 것도 잊고 빛을 가르며 떠가는 구름을 잠시 바라보았다. 평온했다. 내가 폭풍 속에 있는 동안에도 세상 모든 것들은 그렇게 평온하게 흘러가고 있었다.

 타는 듯한 갈증에 텅 빈 냉장고를 들여다보곤 소득 없이 문을 닫았다. 마지막 남은 생수를 어젯밤에 다 마셔버린 걸 깜박했다. 며칠 동안 집 밖에 나가지 않았더니 집엔 물 한 방울 쌀 한 톨 남아 있지 않았다. 배가 고프다. 목이 마르다. 잠시 잊고 있던 감각들이 한꺼번에 아우성을 친다.

 바닥을 더듬어 휴대폰을 찾았다. 휴대폰은 방구석 어딘가에 처박혀 있었다. 배터리가 다 된지 오래라 전원이 꺼진 채였다. 충전기를 꽂고 참을성 있게 휴대폰에 불이 들어오기를 기다렸다. 전원이 켜지기 무섭게 메세지며 톡이며 부재중 전화 같은 것들이 상태 알림창에 다다다닥 올라왔다. 부재중 전화는 우진이에게서 한 통, 이름을 알 수 없는 사용자에게서 한 통, 그리고 형에게서 한 통이 걸려와 있었다. 그리고 문자메세지가 한 건 있었다. 전화를 안 받아 현관 앞에 물건을 두고 간다는 문자였다.

 휴대폰을 덮고 조용히 기억을 더듬었다. 어제 오후에 누가 계속 초인종을 눌러대던 것이 떠올랐다. 가스 검침원이나 잡상인쯤으로 생각했는데. 고개를 갸웃하며 현관문을 열자 묵직한 상자가 문끝에 채였다. 송장이 없는 걸 보니 택배는 아니었다. 일단 상자를 들어 방 안에 옮겼다. 상자에 손을 올리고 봉한 부분을 커터칼로 잘랐다. 그리곤 조심스레 상자의 윗부분을 열었다.

 네모 반듯한 상자 안에 든 것은 연필이었다. 언젠가 형이 선물했던, 토끼 세 마리가 그려진 핑크색 연필. 나는 상자 안에 손을 넣어 차곡차곡 쌓인 연필들을 쓸어 보았다. 따각따각 하는 소리에 가슴이 아렸다. 하나씩 상자에 든 연필을 꺼내 전부 몇 자루인지 세었다. 모두 합해 백 자루였다. 백 자루의 핑크색 연필은 맨질맨질하고 반듯하게 보기 좋은 모양으로 깎여 있었다. 한눈에 알 수 있었다. 형의 솜씨란 걸. 나를 위해 정성 들여 깎았을 연필 한 자루 한 자루는 형의 마음이었고 형의 속삭임이었다.

 연필이 아니라 연필을 깎아주는 형이 좋았던 건데. 그것도 모르고. 바보같이 그런 거 하나 모르고. 두 손 가득 연필을 쥐고 형을 탓해 봐도 뻥 뚫린 가슴은 허전하기만 했다. 이럴 줄 알았으면 그냥 써버릴 걸. 닳아 없어질 때까지 무뎌질 때까지 마음껏 써보기나 할 걸. 너무 소중해서 아껴두느라 그랬던 건데. 한 번 써보지도 못하고 잃어버렸다. 형이 선물한 연필 세 자루도, 형을 향한 내 마음도. 넘치듯이 흐른 눈물이 목과 가슴을 타고 연필 위로 떨어졌다. 백 자루의 속삭임 위로 뒤늦은 후회가 방울방울 맺힌다.

 이제 형은 없다.

 내겐 쓸 곳 없는 백 자루의 연필만이 남았다.







다른 곳에 먼저 올렸다가 갑자기 현타가 와서 삭제했던 글인데

(그때 댓글 달아주셨던 한 분께는 매우 죄송합니다 ㅠㅠ 이 자리를 빌어 사과의 말씀을...)

어쨌든 여기는 저의 개인 공간이니까 올려도 괜찮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재업합니다.

엄밀히 말하면 재업이 아니네욬ㅋㅋㅋ 아무튼.

그냥 캠게 녤윙이 보고 싶었을 뿐인데 뭔가 사족이 기네요. 담번엔 꼭 밝은 느낌으로! 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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