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가 빠진 보도블럭 길에 발이 채여 엎어질 뻔했다. 몇 분 사이 벌써 세 번째였다. 핸드폰만 쳐다보고 있으니 그렇지. 지나가던 아주머니 한 분이 혀를 차며 잔소리를 던지고 간다. 나는 멋쩍게 웃으며 밝기를 최대한으로 올린 휴대폰 화면을 다시금 바라보았다. 예쁘다. 어쩜 이렇게 예쁜 걸까 얘는. 커다란 눈과 새초롬하게 올라간 입꼬리가 도무지 시선을 뗄 수 없게 만든다. 보고 싶다고 셀카를 찍어서 전송해달라고 했더니 지훈은 이런 어마어마한 사진을 보내왔다. 필요이상으로 훌륭한 사진이었다. 아프고 난 뒤로 젖살이 빠진 탓에 얼굴이 조금 헬쓱해 보였지만 표정만은 상큼했다. 보고 싶다니까 사진도 찍어서 보내주고. 연애하는 기분이다 진짜로. 이제서야. 비로소.

 지훈의 집에 가본 것은 처음이었다. 이전까진 어느 동네에 사는지도 몰랐었다. 그날도 택시에 타자마자 습관적으로 자취방 주소를 대려다 마음을 고쳐 먹은 거였다. 먹을 것도 없고 지저분한 자취방으로 데려갔다간 가뜩이나 아픈 애한테 없던 병도 생길 것 같았다. 부모님과 마주칠 각오까지 했는데 도착해보니 집엔 아무도 없었다. 지훈은 기절하기 직전의 목소리로 어머님은 외갓집에 가고 안 계시다 말하곤 침대 위에 쓰러졌다. 나는 지훈이 한잠 푹 자는 동안 어슬렁어슬렁 돌아다니며 집구경을 했다. 들어올 땐 몰랐는데 거실에서 현관으로 이어지는 벽면에 지훈의 성장과정이 액자에 담겨 걸려 있었다. 시대극 차림을 하고 연예인들과 찍은 사진. 짙은 분장을 하고 무대에 오른 모습. 액자들을 훑다가 문득 우진이가 들려줬던 이야기를 떠올렸다. 지훈이는 이렇게 컸구나. 어린 나이에도 참 열심히 살았구나. 떠도는 소문을 직접 눈으로 확인하고 나니 기분이 묘했다. 적어도 두 가지는 맞는 셈이었다. 지훈이 꽤 전도유망한 연예인 지망생이었던 것. 그리고 그 사실을 내게 말해주지 않았다는 것.

 거실에 붙은 스위치를 닥치는 대로 눌러 겨우 간접조명을 찾아 불을 밝히고 TV를 켰다. 그리곤 TV 스탠드에서 찾은 DVD 여러 장을 차례대로 늘어놓았다. 드라마, 뮤지컬, 영화, 시트콤, 장르와 시대가 대중없이 섞여 있어 처음 봤을 땐 도무지 DVD 주인이 가진 취향의 일관성을 찾을 수가 없었다. 한참 뜯어본 후에야 나는 그게 지훈이 출연했던 작품들의 목록이라는 걸 깨달았다. 지훈이 깰까봐 볼륨을 최대한 낮추고 DVD 중 영화 한 편을 재생시켰다. 영화는 지루하지 않을 만큼만 재밌었고 어린 시절의 지훈의 얼굴을 보는 건 즐거웠지만 한 시간에 2~3분이나 나올까 말까 할 정도로 분량이 적었다. 다른 작품들도 사정은 비슷했다. 나는 연신 하품을 하면서도 꺼내놓은 DVD를 전부 틀어보았다. 나중엔 스토리를 쫓는 게 아니라 지훈의 얼굴을 찾는 일에 더 집중하게 되었다. 얼굴도 예쁘고 연기도 나쁘지 않은데 왜 그만뒀을까. DVD를 보는 내내 한결같은 궁금증이 줄곧 머릿속을 떠나지 않고 맴돌았다. 어째서 연습생 시절의 기록은 없는 걸까. 어쩌다 그런 일까지 하게 됐을까. 왜, 대체 왜. 나는 머리를 저어 멋대로 커져가던 부정적인 추측을 털어냈다. 아직 어려도 알맹이가 꽉 찬 인생이었다. 열심히 살아온 남의 인생을 함부로 판단할 순 없었다. 그건 옳지 않았다.

 소파에서 쪽잠을 자고 일어났을 땐 맑은 아침이었다. 밤새 돌려본 DVD를 정리하고 지훈을 깨우러 방으로 들어갔다. 이마에 손을 짚어보니 다행히 열이 많이 내려가 있었다. 작은 소리로 '지훈아' 하고 부르자 기다란 속눈썹이 파르르 떨렸다.

 "아침인데. 학교 갈 수 있겠어?"

 머리칼을 만지작거리며 속삭이자 지훈은 눈을 비비곤 부스스 몸을 일으켰다. 가기 싫다고 할 법도 한데 몸에 밴 성실함 때문에 어떻게든 학교에 가려는 것 같았다. 덩달아 나도 어떻게든 밥을 먹여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급하게 부엌을 뒤져보았다. 가스레인지 위에 지훈의 어머님이 만들어 두고 가신 찌개가 냄비째로 있었다. 새로 지은 밥도 한 솥이었다. 아들이 밥 굶을까봐 걱정이 되셨는지 냉장고에도 밑반찬이 가득이었다. 밥그릇을 못 찾고 어버버거리자 세수를 하고 나온 지훈이 스르르 다가와 두 사람 몫의 밥공기와 수저를 꺼내주었다.

 "같이 먹어요. 밥이 안 줄어 있으면 엄마가 이상하게 생각할 거예요."

 아픈 걸 엄마에게 들킬까봐 걱정이 되어선지 아님 덩치 큰 형이 배고픈데 눈치보는 게 안 되어 보였는지, 지훈은 내게 밥공기를 안기며 말했다. 오랜만에 먹는 집밥은 말로 다 표현할 수 없을 만큼 맛있었다. 허겁지겁 반찬을 집어먹는 동안 지훈은 정확하게 밥을 세 숟갈 뜨곤 숟가락을 내려놓았다. 그리고 내가 밥 두 공기를 순식간에 비우는 걸 웃으며 지켜보았다.

 됐다는 걸 굳이 따라나서 학교까지 데려다주었다. 아무리 어려서 회복이 빠르다 해도 쓰러질 정도로 아팠던 애를 혼자 보내는 게 영 마음에 걸렸던 탓이다. 착각일 수도 있지만 몇몇 아이들이 나와 지훈을 힐끔거리면서 지나가는 게 느껴졌다. 지훈도 시선을 의식했는지 평소보다 조금 떨어진 거리를 유지한 채 나보다 반 걸음 앞에서 걸었다.

 "아프면 전화해. 오늘 휴무일이라 하루종일 집에 있거든. 형이 언제든지 달려올게."

 진심으로 그럴 작정으로 지훈에게 일러주곤 학교 앞에서 헤어져 집으로 돌아왔다. 오후가 될 때까지 지훈에게선 연락이 없었다. 괜찮은 건가. 아픈데 또 참고 있는 건 아닐까. 약간은 안도하고 한편으론 걱정하며 연락을 기다리고 있는데 현관에서 벨소리가 들렸다. 택배인가. 갸우뚱하며 문을 열자 낯선 인상의 남자가 눈을 깜박이며 나를 바라보았다.

 "안녕하세요. 여기 주인집 아들인데요. 곧 여름이라 에어컨 점검하려고 하는데 혹시 이상이 있거나 그러진 않나요?"

 나는 뒷머리를 긁으며 어... 하고 대답을 끌었다. 작년까진 멀쩡했는데 올해엔 아직 한 번도 켜보지 않아 상태가 어떤지 알 수 없었다. 아마 그럴 걸요? 말 같지도 않은 대답을 하고 나니 부끄러워져 얼굴이 달아올랐다.

 "혹시 모르니까 한 번 확인해봐도 될까요?"

 나는 주인집 아들을 곤란한 눈빛으로 쳐다보았다. 점검받는 건 좋지만 아직 에어컨 청소를 안 해서 먼지며 곰팡이가 가득 껴 있을 상상을 하니 창피스러웠다. 주인집 아들 뒤에서 흠, 하고 헛기침 하는 소리가 들렸다. 몰랐는데 뒤에 사람이 한 명 더 있었다. 손에 든 공구박스를 보아 기술자인 것 같았다. 나는 어쩔 수 없이 들어오시라 말하며 길을 터주었다. 그럼 실례하겠습니다. 자기 집에 들어오면서 주인집 아들은 공손하게 인사하고 신을 벗었다. 아이러니한 광경이었다.

 기술자가 코드를 콘센트에 꽂고 에어컨 커버를 막 벗기려는 순간 휴대폰이 울렸다. 지훈의 전화였다. 재빨리 욕실로 들어가 문을 닫았다. 여보세요. 작게 말했는데도 타일에 부딪친 내 목소리가 왕왕 울렸다.

 "왜 그래? 무슨 일 있어? 또 어디 아파?"
 - 아뇨. 괜찮아요. 다 나은 것 같아요.
 "다행이네. 놀랐잖아. 갑자기 전화해서. 또 아픈 줄 알고."
 - 형.
 "응?"
 - 보고 싶어요.

 나도. 말이 튀어나오려는 걸 가까스로 참았다. 어쩌다 이렇게 참을성 없는 인간이 되었나 난. 반성하며 맘에도 없는 말로 대꾸했다. 오늘 아침에도 얼굴 봤잖아, 하면서.

 - 형네 집으로 가도 돼요?

 안 된다고 말해야 하는데. 어른스럽게 그래야 하는데. 고개를 들자 거울에 비친 헤벌쭉 웃고 있는 내 얼굴이 보였다. 사실은 벌써 전철 탔는데. 사랑스런 말투에 꽃이 피어나듯 활짝 열린 가슴은 향긋하게 흐트러졌다.

 "그럼 형이 역 앞으로 데리러 갈게."
 - 네, 형.

 실실거리지 않으려 단단히 표정을 고치고 욕실에서 나왔다. 거의 동시에 주인집 아들과 기술자도 방에서 걸어나왔다. 별 이상 없는 것 같네요. 아마도 십수 번은 되풀이했을 말을 무덤덤하게 남기고서 두 사람은 자리를 떴다. 나도 서둘러 전철역으로 향했다. 먼저 도착한 지훈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미열 때문에 얼굴이 발갰다. 두 손으로 얼굴 이곳저곳을 쓸어 만지며 키스를 하듯 시선으로 지훈을 훑었다.

 "집으로 가요."

 장난치듯 손가락을 끌어당기며 지훈은 앞장서서 걸음을 뗐다. 집에 도착해 현관문을 닫자마자 지훈은 두 팔로 목을 감아 당기며 다짜고짜 입을 맞췄다. 성급한 키스를 고스란히 다 받아준 후에야 나는 지훈의 몸을 떼어냈다. 왜 그래. 구름처럼 목소리가 붕 떠 있어서 묻는 말에 현실감이 없었다.

 "못했잖아요, 우리 오랫동안."

 그런 엄청난 말을 하면서 지훈은 교복 단추를 풀었다. 바닥에 떨어진 교복을 함부로 밟아가며, 나는 지훈을 안고서 비틀비틀 침대로 향했다. 조급한 마음에 현관에서 침대까지의 거리가 아득하게 멀게만 느껴졌다.

 그렇게까지 좋을 건 없었는데. 난 정말 쓰레기인가 보다. 뭉게뭉게 피어오르는 과거의 나쁜 행적에 자포자기한 심정으로 한숨을 쉬었다. 여전히 시선은 휴대폰에 고정한 채였다. 웃고 있던 지훈의 얼굴이 화면 조명이 꺼지며 까맣게 변한다. 홈 버튼을 누르려다 그만큼 했으면 됐단 생각에 뒷주머니에 휴대폰을 집어넣었다. 어차피 열 걸음만 가면 집 앞이었다. 그리고 다섯 걸음쯤 걸었을 때 기다란 그림자 하나가 발치에 걸렸다. 고개를 들어보니 웬 날건달 하나가 실실 웃으며 나를 기분 나쁘게 쳐다보았다.

 "나 참, 어이가 없어서."

 누구에게 하는 소린지. 당황해서 주위를 둘러봤지만 근처엔 나 말고 아무도 없었다. 왜 시비지. 당황스러웠고 불쾌한 동시에 약간 겁이 났다. 마르고 작은 체구였지만 인상이 아주 고약했다. 나이는 마흔쯤 됐을까. 맨손으로 붙으면 내가 이길 수도 있을 것 같았지만 그런 일은 없어야 했다. 없는 것이 좋았다. 남자는 바닥에 가래침을 퉤 뱉더니 확인사살을 하듯이 정확하게 내 얼굴을 노려보았다.

 "얼마나 잘난 새낀가 면상이나 한 번 보자 하고 왔더니만 완전 핏덩이네. 박지훈 그거 물건인 줄 알았더니 실망이야. 애가 맛이 갔어."
 "뭐라고요?"

 말을 뱉고 나서야 아차 싶었다. 애초에 상대를 하지 말았어야 했는데. 눈을 질끈 내리감고서 호흡을 골랐다. 남자의 입에서 지훈의 이름을 듣고 반응한 게 실수였다. 침착하자. 그 와중에도 머리는 바쁘게 굴러갔다. 저 건달과 지훈이는 무슨 사이일까. 하지만 아무리 상상력을 발휘해봐도 둘 사이의 접점을 찾기가 어려웠다.

 "선생님, 나 기억 안 나요? 전화로 지랄할 땐 언제고 그새 새카맣게 까먹으셨어. 나이도 젊은 양반이."

 선생님, 하고 부르자마자 거짓말처럼 잊고 있던 기억이 되살아났다. 지훈과 연락이 닿지 않아 궁리 끝에 대리기사 콜을 넣었을 때 들었던 목소리였다. 지훈과 연결해달라고 떼를 쓰자 당신 누구냐며 험악하게 욕설을 퍼부었던 그 목소리였다. 나는 멍청하게 입을 벌린 채 아무 말도 못하고 굳어버렸다. 보이지 않는 곳에서부터 소름이 올라왔다.

 "이제야 기억이 나셨나 보네. 왜 이렇게 늦으셨어? 한참 기다렸잖아, 씨발."
 "여긴 어떻게 알고...."
 "이 정도 알아내는 건 껌이지 뭐. 요즘 세상에 휴대폰 번호 하나만 갖고도 할 수 있는 게 얼마나 많은데. 안 그래요? 강다니엘 선생님?"

 이번에도 나는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구구절절 옳은 말이었다. 건달들이 운영하는 불법적인 회사에 협박 전화를 걸면서 발신자 표시제한도 걸지 않다니. 스스로의 멍청함에 울컥 화가 치밀었다.

 "전화로 지랄 염병을 하더니만 결국 다시 만났나봐. 우리 지훈이."

 남자의 화법은 이상하게 사람의 마음을 긁는 데가 있었다. 우리 지훈이, 라는 말도 그랬다. 둘이 그만큼 가깝다는 건가. 듣기에 묘하게 거슬려 얼굴을 찌푸렸다. 내가 그러거나 말거나 남자는 자기 휴대폰을 꺼내더니 내 눈앞에서 모빌처럼 달랑달랑 흔들어댔다.

 "우리 지훈이랑 아주 찐하게 붙어 먹던데. 확실히 걔가 보통이 아니긴 한가봐. 아주 그냥 뿅 가셨더만."

 피가 거꾸로 솟는 듯했다. 그런 말을 들었으면 화부터 나는 게 정상인데 정작 나를 덮쳐온 건 정체불명의 공포였다. 나도 모르게 쉿, 하고 외치고선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얼굴이 터져나갈 듯이 뜨겁게 달아올랐다.

 "그게 무슨 말인지...."
 "젊은 양반이 의심도 많네. 어쩔 수 있나. 못 믿겠음 보여드려야지."

 남자는 기세등등하게 휴대폰 화면을 들이댔다. 재생바를 보니 길이가 20분 정도 되는 긴 길이의 영상이었다. 화면 속의 두 남자는 현관에서부터 옷을 벗으며 서로에게 엉켜들었다. 나체가 된 소년이 침대에 드러눕자 그 위로 넓고 판판한 어깨가 올라타 화면의 절반을 가렸다. 어깨는 소년의 가슴에 키스마크를 남기고 고개를 들어 뒤로 꺾었다. 그러자 한 번도 제대로 잡히지 않았던 어깨의 얼굴이 선명히 드러났다. 썩 좋은 화질은 아니었지만 장님이 아니고서야 화면 속의 인물이 누군지 알아보는 건 어렵지 않았다. 어깨는 나였다. 영락없는 내 얼굴과 내 목소리와 내 몸이 영상 안에 있었다. 처음 보는 불쾌한 남자 앞에서 누군가와 관계하는 내 모습을 철저하게 복습하는 건 상상 이상의 수치심을 불러일으켰다. 수치심으로 뇌가 증발해버린 것 같았다. 그래서 아무런 생각도 할 수가 없었다. 하얗게 질린 내 얼굴을 뻔히 보고 있으면서도 남자는 영상을 멈출 생각을 하지 않았다. 내가 고통스러워 하는 걸 즐기고 있는 듯했다. 이걸 어떻게 찍었지. 파업을 선언한 머리통을 간신히 가동시켜 겨우 짜낸 첫 번째 생각은 그거였다. 찍힌 각도로 보아 카메라가 설치된 위치는 침대 위 천장 모서리에 가까워 보였다. 그리고 그 위치엔 벽걸이형 에어컨이 달려 있었다. 에어컨. 점검을 핑계로 갑작스레 집으로 들이닥친 주인집 아들과 에어컨 기사가 떠올랐다. 그들이었다. 그들이 범인이었다. 그런 인간들에게 손수 문을 열어주고 작업하기 쉽게 자리까지 피해주었다니. 스스로를 향한 분노가 또 한 번 용암처럼 자글자글 끓어오른다.

 "하필이면 얘가 이쁘게 교복까지 입고 있어서 이건 뭐 빼박이지, 빼박. 미성년자랑 떡치면 어떻게 되는지 알아요? 철컹철컹. 아이고 손목 시려라."

 남자는 말춤을 추듯 양쪽 손목을 교차시켜 방정맞게 흔들어댔다. 우스꽝스러운 동작이었지만 조금도 웃음이 나지 않았다. 나는 고요한 분노를 느끼며 가만히 주먹을 말아쥐었다. 깊은 크레바스 같은 절망의 끝에서 충동적인 살의가 피어올랐다. 옅고 흐릿한 연기였지만 신호는 분명했다. 저 깊은 곳에서 무언가가 타오르고 있었다. 죽여버리고 싶다는 증오보다 강한, 죽여야겠다는 의지가. 처음이었다. 누군가를 해치고 싶은 강렬한 욕망을 느낀 것은.

 "이걸 강다니엘 씨 친구들이 보면 뭐라고 할까? 부산에 계신 부모님이 보시면? 댄스 아카데미 수강생들이랑 다른 선생들이 보면 어떻게 되겠느냔 말이야."
 "그래서 저한테 원하는 게 뭔데요?"

 이제야 좀 질문 같은 질문을 하네. 아무 말도 안 했지만 남자의 눈빛은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지훈이한테 일 다시 나오라고 해요."

 그런 말을 어떻게.... 입 안에 고인 말이 튀어나오기도 전에 남자는 명함 한 장을 꺼내 가슴팍에 던졌다. 캄캄하게 변한 시야가 개였을 땐 남자는 이미 사라진 뒤였다. 나는 허겁지겁 집으로 뛰쳐들어가 신발을 아무렇게나 벗어던지고 미친놈처럼 에어컨에 달려들었다. 카메라는 에어컨 필터와 외곽 케이스 사이에 절묘하게 숨겨져 있었다. 카메라라는 게 믿기지 않을 정도의 크기였다. 나는 거칠게 카메라를 떼어내 발로 밟아 부쉈다. 미개한 원시부족처럼 괴상한 소리를 지르며. 렌즈가 가루가 될 때까지. 파편이 발바닥에 박혔는지 아릿한 통증이 발등을 뚫고 올라왔다. 그제서야 나는 렌즈를 박살내길 멈추고 침대에 주저앉았다. 오른발을 들자 흰 양말이 붉게 물들어 있는 게 보였다. 왼쪽 발뒤꿈치에는 종잇장 하나가 포스트잇처럼 딱 달라붙어 있었다. 남자가 주고 간 명함이었다. 나는 축축한 시선으로 명함에 적힌 글자들을 맥없이 바라보았다. 한윤성. 날건달이 갖기엔 지나치게 멀쩡한 이름이었다. 발을 구른 숫자만큼 내 머릿속에서 여러 번 살해된 자의 이름이었다. 인간으로 환생해 나타난 악마의 이름이었다. 아마도 죽을 때까지 못 잊을 이름이었다.

 묽고 뜨거운 것이 넘실대며 차올라 숨을 막았다. 피눈물이 끓는다는 건 이런 거구나. 하찮은 깨달음에 울 수조차 없었다. 울어도 울지 않아도 나는 비참할 터였다. 지훈은 불행할 터였다. 변하는 건 없을 터였다.

 윙- 휴대폰이 울더니 저장해놓은 지훈의 사진이 밝게 떠올랐다. 걸려온 전화를 받지 못하고 멍하니 바라보다 휴대폰을 뒤집었다. 그것만이 내가 할 수 있는 전부였다.







이제 겨우 행복해지나 했는데 녤윙에게 또 한 번의 시련이 오네요.

잘 견뎌내서 두 사람 깨볶는 모습을 저도 넘나 보고 싶습니다 ㅠㅠ

그럼 전 빨리 다음편 연성하러... 재밌게 보셨다면 짧게라도 감상 남겨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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