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일락. 장미. 벚꽃. 유채.

 마른 입술 위로 계절을 무시한 꽃말들이 앉았다 간다. 순서를 틀리면 안 되니까 입으로 꽃말을 외면서 물건들을 일렬로 줄지어 세운다. 이번에 새로 나온 신상품은 제비꽃 라인이다. 하얀 용기에 연보라색으로 그려진 제비꽃 무늬를 만지작거리다 하나를 빼두었다. 겉면을 보니 '바디 로션'이라고 써 있다.

 윗니로 입술을 드륵드륵 갉다가 아차, 하고 립밤을 꺼냈다. 화장품 가게 점원 입술이 하얗게 터 있으면 손님들이 오겠냐며 점장님은 늘 잔소리를 하셨다. 그 얘길 술안주 삼아 슬쩍 풀었더니 다음날 가게로 찾아와 선물이라며 이런 걸 던져주고 갔다. Dior. 핑크색 케이스에 새겨진 은빛 활자가 부끄러워, 나는 사람이 없는 곳에서만 몰래 립밤을 꺼내 발랐다. 립밤이 필요한 거였음 그냥 가게에 있는 걸 아무 거나 꺼내 써도 되는데. 지훈은 꼭 이럴 때만 눈치가 없었다.

 소름끼치게 여성스러운 케이스를 노려보다 다시 주머니 속에 쑤셔넣었다. 여자처럼 예쁘다는 말을 하도 많이 듣고 자라 조금이라도 오해를 살 만한 구석이 있는 건 질겁을 하고 피해다녔는데. 그런 나를 알면서 이런 걸 선물이라고 갖다주다니. 지훈의 호의에 화를 내야 할지 고마워 해야 할지 헷갈리기만 하다. 생각해보니 지훈은 꼭 내가 질색할 일만 골라서 하고 다녔다. 친구만 아니었다면 그럴 때마다 일일이 참아주지 않았을 거다. 지훈은 늘 나의 유일한 예외였다. 다른 사람이었으면 결코 용서하지 않았을 일들도, 지훈이라서 참고 넘어갈 수 있었다. 이를테면 남자를 만나고 다니는 것. 그것도 병신 같은 남자들만 골라서 만나는 것. 그 남자가 병신이라는 걸 알면서도 헤어질 생각을 않는 것.

 이런 걸 쓸까. 잘 모르겠다. 제비꽃 향의 바디 로션을 집었다 놓았다 하면서 나는 계속 고민한다. 그래도 선물을 받았으니 나도 뭔가를 줘야 할 것 같았다. 답례라고 하면서 주면 어딘가에 쓰겠지. 남자들끼리 화장품 선물이라니. 다른 상대였다면 치를 떨며 분개했을 일도 지훈이라 싫지 않다.

 예쁘게 포장해주세요. 웃는 얼굴로 부탁하고 지갑을 꺼내는데 뭔가가 툭 하고 떨어진다.

 - 맘에 안 들면 환불해.

 맘에 안 들리가 없잖아. 혼잣말을 삼키며 영수증을 주워 립밤이 든 주머니에 함께 찔러 넣는다.

 아무래도 오늘 지훈을 만나야 할 것 같다.






 "박지훈!"

 떠들썩한 호프집 한가운데에서도 지훈은 곧잘 내 목소리를 분간해냈다. 목소릴 듣고 돌아보는 얼굴이 반갑다. 자기 몸보다 한 사이즈는 커 보이는 야구 점퍼를 느슨하게 걸친 탓에 오늘따라 더 애처럼 보였다.

 "일찍 왔네? 오래 기다렸어?"
 "별로."

 지훈은 무슨 일로 보자고 했냐며 오자마자 용건을 물었다. 그냥, 보고 싶어서. 대답을 얼버무리며 맥주 두 잔과 안주를 주문했다. 헐렁한 야구 점퍼가 자꾸만 신경이 쓰인다. 좋아하는 안주를 앞에 두고도 지훈은 다이어트 중이라며 맥주만 홀짝였다. 니가 다이어트를 왜? 놀라서 묻자 요즘 살이 붙어서 빼야 한단다. 어처구니가 없다.

 "그렇게 빼고도 아직 부족한 거야?"
 "그 얘긴 하지 마라."

 웃는 낯으로 조곤조곤 협박 아닌 협박을 하더니 건배, 하며 잔을 든다. 다이어트를 위하여! 꼴깍꼴깍 맥주를 넘기는 목덜미를 물끄러미 바라보다 마지못해 한 모금 따라 삼켰다. 물을 탄 듯 밍밍한 맥주의 뒷맛이 쌉싸름했다.

 우리의 관계도 그와 같았다. 내가 슌, 그러니까 지훈을 처음 만났을 땐 지금과 많은 것이 달랐다. 우리는 중국에 있었고, 열다섯이었으며, 지훈은 지금보다 통통한 체격에 발그레한 두 볼을 갖고 있었다. 중국어가 서툴렀던 그는 수시로 한국인을 혐오하는 무리들의 표적이 되었다. 그럴 때마다 나는 매번 지훈의 편에서 그를 감싸주곤 했다. 우리가 이 밍밍하고 쌉싸름한 관계를 어떻게든 유지할 수 있었던 건, 그 시절의 고마움을 여즉 지훈이 잊지 못하고 있기 때문인지도 몰랐다.

 이 년 뒤, 지훈은 가족들과 함께 한국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나도 아버지의 사업 문제로 이듬해 한국행 비행기를 타게 되었다. 우리가 재회한 것은 그로부터 다시 이 년이 더 지난 어느 여름, 서울에 있는 대학 캠퍼스에서였다. 지훈은 달라져 있었다. '슌'이 아니라 '지훈'이었다. 어렸을 적 포동했던 볼살은 완전히 사라지고 또렷하게 남은 이목구비에선 잘생김이 듬뿍 넘쳐 흘렀다. 그럼에도 물결치듯 부드럽게 휘어진 눈매와 반짝거리는 인상만은 그대로였다. 달라진 지훈을 바로 알아볼 수 있었던 건 그 때문이었다.

 "슌!"

 이름을 부르자 동그란 머리통이 휘리릭 뒤를 돌아보았다. 놀란 것은 나 혼자만이 아니었다. 스물이 된 지훈의 얼굴에도 당혹스러운 표정이 떠올랐다 사라졌다.

 "너무 오랜만이다. 너 슌 맞지?"
 "지훈이야. 박지훈."

 난처한 얼굴로 지훈은 내 말을 고쳤다. 그래서 어렴풋이 깨달을 수 있었다. 내가 알던 슌과 지금의 지훈은 다른 사람이란 걸. 나는 약간 당황했지만 그렇다고 반가운 마음이 사라진 건 아니었다. 대화가 길어질 것을 직감한 우리는 학관으로 자리를 옮겼다. 다행히 공강이라 한 시간 남짓 시간을 낼 수 있었다.

 "공부 열심히 했구나, 너."

 대단한데? 지훈의 칭찬에 얼굴이 붉어졌다. 상해에서 학교를 다닐 땐 성적이 형편없어서 한국으로 돌아와도 좋은 대학에 가게 될 거란 기대는 하지 않았었다. 운이 좋았을 뿐이라고 대답하며 머리를 긁었다.

 "여기서 이렇게 보게 될 줄은 몰랐네. 무슨 과야?"
 "아... 난 여기 학생 아니야. 어학당 다녀."

 어학당? 놀라서 반문하자 지훈은 또 한 번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지훈은 한국어가 아니라 중국어를 배우러 어학당에 오는 거라 했다. 중국인들에게 한국어를 가르쳐주면서 자연스레 중국어를 배울 수 있다는 게 그의 설명이었다. 솔직히 말해 처음 그 말을 들었을 땐 납득이 가지 않았다. 그래도 이해하는 척했다. 다시 만날 약속을 잡으려면 그래야 했다.

 진실을 알게 된 건 그로부터 며칠이 지난 뒤였다. 아르바이트를 마치고 우연히 길에서 같은 과 동기인 형섭을 만나 같이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었다. 형섭은 베이징에서 몇 년 유학한 경험이 있는 중국어 특기생이었다. 나처럼 약간의 중국어 실력으로 중어중문학과에 입학했고 메인 스트리트에 있는 또 다른 로드샵에서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었다. 이러려고 중국어를 배웠던 건 아닌데. 우리는 자조적인 태도로 일의 고단함과 중국인 손님의 무례함에 대해 적당히 투덜거리고 내일 모레 있을 전공 시험의 스트레스를 나눴다.

 "시험 끝나면 뭐할 거야?"

 형섭은 아이스크림을 입 안에서 돌돌 돌려 녹이며 물었다. 글쎄. 뭘 하지. 곰곰이 생각하다 문득 지훈의 얼굴이 떠올랐다. 친구 만나려고. 충동적으로 한 말인데 뱉어놓고 나니 정말로 지훈을 꼭 만나야겠단 생각이 들었다.

 "상해에 있을 때 친했던 친구랑 얼마 전에 우연찮게 학교 안에서 마주쳤거든."
 "누구?"
 "얘기해도 넌 잘 모를 거야. 학부생이 아니라서. 어학당에 다닌대. 중국어 배운다고. 이름은 박지훈이고..."

 내 말을 끝까지 듣지도 않고서 형섭은 토끼처럼 눈을 동그랗게 떴다.

 "박지훈? 설마 그 박지훈?"
 "너 지훈이를 알아?"
 "당연히 알지."

 그날 형섭이 내게 들려준 이야기는 몹시 충격적인 것이었다. 내게 지훈이 있었던 것처럼, 형섭에게도 베이징에 있을 때 사귀었던 친구들이 있었다. 차이가 있다면 그들은 중국 국적을 가진 네이티브 중국인이라는 것이었다. 형섭은 한국으로 귀국한 뒤에도 중국인 친구들과 계속 연락을 주고받았다. 그리고 그들이 한국 유학을 결심했을 때엔 발벗고 나서 어학당을 알아봐주기도 했다. 그게 바로 우리 학교 어학당이었다. 본격적으로 어학당에서 공부를 시작하게 된 친구들은 수업 숙제를 도와달라며 자주 형섭을 귀찮게 했다. 착한 형섭은 친구들이 불러낼 때마다 매번 숙제를 도와주러 달려갔다. 그리고 그때마다 친구들과 함께 따라나온 낯선 한국인을 만났다. 그게 바로 지훈이었다.

 형섭의 말에 따르면 애초에 지훈은 어학당의 학생이 아니라 손님이었다. 어학당에서 강사로 일하는 친형의 수업 도우미로 한 번 왔던 것이 전부였다. 하지만 학생들은 제사보단 젯밥에 관심이 더 많았다. 성격도 좋고 얼굴도 예쁘장한 지훈에게 관심을 보인 사람은 남자와 여자를 모두 포함해 한둘이 아니었다. 수업이 끝난 후 처음으로 지훈의 연락처를 따낸 것은 가장 한국말이 서툴렀던 중국인이었다. 그게 지훈의 첫 번째 연애였다. 둘은 일주일만에 헤어졌다. 두 번째 연애 상대는 귀여운 연상의 일본인이었다. 열흘 뒤에 지훈은 또 다른 중국인과 만나기 시작했다. 그게 바로 형섭의 친구였다. 알고 보니 지훈은 다가오는 사람은 누구든 거절하지 않고 받아주었고, 연애를 지속하는 동안에도 다른 사람에게 곧잘 한눈을 팔았다. 더 최악인 건 상대가 먼저 헤어지자고 하기 전까지는 절대로 먼저 관계를 끝내는 법이 없었다. 상대가 먼저 견디지 못하고 헤어지자는 말을 꺼내게 만드는 타입이었다. 한 번 갖기는 쉽지만 두 번 갖기는 어려운 남자 박지훈의 평판은 바닥까지 떨어졌다. 어학당 내에서 지훈을 모르는 사람은 이제 아무도 없었다.

 "지금 만나는 애는 별로 좋지 않은 녀석이라 들었어. 질투도 심하고."

 이름이 뭐라더라. 형섭은 만다린어로 녀석의 이름을 말했지만 나는 제대로 듣지 못했다. 충격 때문에 낯선 외국어 이름이 귀에 잘 들어오지 않았다.

 "무슨 생각해?"

 맛없는 맥주를 홀짝이던 지훈이 커다란 눈을 더 커다랗게 뜨고는 내 얼굴을 뚫어져라 보았다. 아냐, 하고 고개를 젓다 문득 궁금해졌다. 형섭이 내게 말했던 녀석의 이름이.

 "요즘 만나는 사람 있어?"
 "그런 걸 왜 물어."
 "말 못할 것도 없잖아."
 "없어."
 "진짜로? 맹세해?"

 지훈은 맥주를 마시다 말고 풋 웃음을 뱉어냈다.

 "그 말버릇 여전하네."
 "말꼬리 돌리지 말고. 예전엔 너 나 좋다고 그랬었잖아."
 "너는 나 싫다며."
 "그건 그때고. 지금은 지금."
 "됐거든요?"

 오는 사람 막지 않고 가는 사람 막지 않는 박지훈에게도 예외는 있었다. 내게 지훈이 예외이듯, 지훈에게도 나란 존재는 그렇게 예외가 되었다. 정확한 이유는 알 수 없었다. 다만 짐작할 따름이었다. 상해에서의 일로 지훈이 나를 함부로 대하지 못하는 거라고. 난 너 좋은데. 갑작스런 고백이었다. 한국으로 돌아가게 되었다는 소식을 전하며 지훈은 불쑥 장난스레 고백했다. 그런 지훈의 마음을 나는 똑같이 장난처럼 거절했다. 하나뿐인 친구를 잃게 된 상실감에 열일곱의 나는 상처를 받았던 것 같다. 그리고 우리가 다시 재회했을 때, 그 일은 아예 없었던 것처럼 되어 있었다. 하지만 우린 알고 있었다. 그때의 마음은 장난이 아니었단 걸. 우리 사이에 보이지 않는 벽이 생겨났으며 그 벽이 우리를 한없이 조심스럽게 만들고 있음을.

 어긋났다. 우리는. 우리의 관계가 밍밍한 맥주처럼 되어버린 건 그 때문이었다. 이상스런 고백과 그보다 더 이상스런 거절 뒤에 남은 건 쌉싸름한, 아니 씁쓰레한 뒷맛 같은 불편함이었다. 그건 아직도 현재진행형이었다. 학교 안에서 지훈은 내게 자주 목격되었고, 주로 남자의 곁에서 밝게 웃고 있었으며, 남자의 얼굴과 키는 볼 때마다 달랐다. 나는 그런 지훈을 애써 못 본 척했다. 왜 못 본 척하고 있지. 어느 순간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내 마음을 의심하게 된 건 그 때문이었다. 어쩌면 나는 지훈을 친구 이상으로 좋아하고 있을지도 모른다고. 그게 사실이라면 정말 큰일이었다. 우리는 완전한 친구도, 새로운 연인도 될 수 없는 사이니까.

 "근데 할 말이란 게 뭐야?"

 어색한 분위기를 참다 못한 지훈이 재촉하듯 물었다. 나는 머뭇거리며 예쁘게 포장된 바디 로션을 꺼내 테이블 위로 밀어 건넸다.

 "이게 뭔데?"
 "보답."

 눈만 동그랗게 뜨고 영 이해를 하지 못하는 지훈을 위해 주머니에서 립밤을 꺼내 흔들었다. 술 취한 남자들의 주정 소리와 술 냄새가 가득한 호프집에서 핑크색 립밤 케이스는 지독히도 눈에 띄었다.

 "이거, 고마워서."
 "에? 설마 그거 때문에 일부러 산 거야?"

 꼭 그런 건 아니라고 말하려다 잠자코 입을 다물었다. 지훈은 포장지를 벗기고 내용물을 확인하더니 의미를 알 수 없는 웃음을 지었다. 좋은 건지 나쁜 건지 반응을 보고도 알 수가 없었다.

 "고마워. 잘 쓸게."

 마음에 든 걸까. 그의 말에서 진실과 거짓을 가려내는 사이, 지훈은 다정하지만 단호한 말투로 분명한 선을 그었다.

 "근데 다음부턴 그러지 마. 그냥 내가 주고 싶어서 준 거니까."

 그러니까 오늘 맥주는 내가 산다. 뭐가 좋은지 싱글벙글한 얼굴로 카드를 꺼내 들고선 영수증을 챙긴다. 그러지 말라고 말릴 새도 없었다.

 나도 마찬가지란 걸, 너는 왜 모르는 걸까.

 너무 빨리 끝나버린 술자리가 아쉬워, 나는 쉽사리 자리에서 일어서지 못했다.






 불행은 언제나 예측을 한 발 앞질러 온다.

 오늘은 갑작스레 들이닥친 인도인 관광객들로 꽤나 애를 먹었다. 대학가 메인 스트리트에서 로드샵 투어를 다니는 건 주로 중국인 아니면 일본인들이라 매장에 인도어를 할 줄 아는 직원을 배치하는 경우는 드물었다. 내가 일하는 가게도 마찬가지였다. 말이 통하지 않자 인도인 손님들은 영어로 대화를 시도했지만, 영어에 젬병인 내겐 인도어로 말하는 것이나 영어로 말하는 것이나 알아듣지 못하는 데엔 별 차이가 없었다. 결국 한 블럭 건너에 있는 다른 브랜드 매장에서 영어를 할 줄 아는 직원을 꾸어와 간신히 위기상황을 모면할 수 있었다. 분풀이라도 하듯 인도인들은 물건을 엄청나게 사 갔다. 높아진 매출에 기분이 좋아진 점장님은 즉석에서 회식 자리를 제안했다. 도움을 받았는데 가만히 있을 수 없다는 거였다.

 그리하여 경쟁사 직원들과 함께 하는 기묘한 회식이 성사되었다. 삼겹살을 앞에 두고도 사람들은 눈치를 보느라 좀처럼 먹지를 않았다. 왠지 지는 기분이 들어서였다. 우리들이 무능력해서 남의 도움을 받아놓고 회식이라니. 내 잘못도 아닌데 위축이 되어 어서 자리에서 일어날 기회만 엿보고 있는데, 누군가 곁에 다가와 옆구리를 찔렀다.

 "진영아."

 목소리를 듣고서야 형섭이라는 걸 알아차렸다. 깜박하고 있었다. 형섭도 메인 스트리트에 있는 화장품 가게에서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단 걸. 형섭은 재빨리 사이다병과 잔을 들고 비어 있는 옆자리를 꿰차고 들어왔다. 조금 전까지 지루해 죽을 것 같았던 술자리가 비로소 활기를 띤다.

 "아직도 거기서 일하는 줄 몰랐어. 견딜만 해?"
 "그럭저럭."

 길거리에서 우연히 마주친 뒤로는 가끔 수업에서 본 게 전부라 형섭과 대화를 나누긴 오랜만이었다. 아직 같은 곳에서 일을 하고 있는 줄은 몰랐다. 내가 그토록 타인에게 무관심한 성격이었나. 괜히 미안한 마음이 들어 별로 궁금하지도 않은 안부를 묻고 나니 대화거리가 떨어졌다. 공통의 화제를 필사적으로 생각하다 기어이 지훈의 이야기를 꺼내고 말았다.

 "혹시 아직도 지훈이 소식 들어?"
 "누구? 아, 박지훈."

 형섭은 고기 한 점을 입 안에 넣은 채 우물거리며 답했다. 시험 끝나고 만난다더니, 아직 못 봤나봐? 묻는 말에 거짓으로 끄덕였다.

 "지난번에 말해줬던 게 내가 아는 전부야. 그 뒤로는 들은 게 없어."
 "그러니까 그거 말인데, 지훈이가 만나는 사람 이름이 뭐라고 했었지?"
 "라이관린. 근데 걔랑은 깨졌을 걸? 끝이 좋지 않게 헤어졌는데, 그 뒤로도 꾸준히 집적거리고 있나봐. 문제가 많다고 들었어."
 "뭐?"

 나도 모르게 목소리가 커졌다. 옆테이블에서 건배를 하고 있던 알바생들이 잔을 든 채로 일제히 나를 쳐다보았다. 나는 고개를 저으며 잔에 든 사이다를 원샷으로 넘겼다. 잔을 깨끗이 비우고 나서야 그게 사이다가 아니라 게임에 쓰려고 채워둔 소주라는 걸 알았다.

 "그럴 리가. 지훈이 성격이 얼마나 쿨한데."
 "이번에는 상대방이 아니라 박지훈 쪽에서 헤어지자고 했대. 그래서 미련이 남아 계속 질척하게 매달리는 거라고 하던데. 나도 들은 얘기라 진짜인지 아닌지는 몰라."

 그러지 말고 직접 물어보지 그래? 상해에 있을 때 친했다며. 실컷 다 말해주고 나서야 형섭은 뭔가 깨달은 듯이 눈을 깜박이며 말했다.

 "미안. 먼저 가볼게."

 제대로 된 인사도 하지 않고 고깃집 밖으로 걸어나왔다. 칼바람이 부는 밤거리는 얼어 죽을 만큼 추웠지만, 내 몸은 그와 반대로 점점 뜨거워졌다. 속에서 화한 기운이 올라와 오히려 더울 지경이었다. 외투를 제대로 여미지도 않고서 나는 대뜸 휴대폰을 꺼내 전화를 걸었다. 지훈에게 거는 전화였다. 왜 전화를 걸고 있는지, 전화를 걸어서 뭘 어쩌자는 건지는 나도 몰랐다.

 - 여보세요.

 정말로 전화를 받을 줄은 몰랐다. 지훈의 목소릴 듣자 거짓말처럼 용기가 사라져 아무 생각도 나질 않았다. 말문이 막혀 그대로 전화를 끊었다. 끊긴 전화를 붙들고 정처없이 걷던 걸음을 멈췄다. 정확한 타이밍에 택시 한 대가 내 앞에 미끄러지듯 멈춰섰다. 나는 아무 생각없이 택시에 올라탔다. 술에 취하니 모든 행동이 충동적이 되었다. 그러고도 후회하지 않는 것 역시 내가 취해 있단 증거였다.

 "흑석동이요."

 엉겁결에 집으로 향하는 행선지를 말하고 좌석 시트에 깊게 몸을 파묻었다. 바보 같았다. 병신 같은 남자만 골라서 좋아하는 녀석이나, 그런 녀석을 알면서도 방관했던 나까지도 하나같이 바보들이었다. 녀석의 곁에 누가 있는지만 살피느라 미처 알지 못했다. 그런 곤란한 일을 당하고 있었는지. 열다섯의 우리였다면 달랐을까. 열일곱의 우리였다면 어땠을까. 우리는 어디서부터 잘못된 걸까.

 위이잉, 하고 손 안에서 휴대폰이 길게 울렸다. 힐끔 내려다 보니 지훈의 번호였다. 좀 전의 전화가 그렇게 끊긴 것이 신경쓰였던 모양이다. 나는 몇 차례 더 휴대폰이 울도록 놔두었다가 전화를 받았다.

 - 왜 아무 말도 없이 전화를 끊어? 무슨 일 있어?
 "아니. 아무 일 없어."
 - 그럼 왜?

 지훈의 목소리 뒤로 시끄러운 잡음이 끼어들었다. 술에 취한 정신으로도 똑똑히 알아들을 수 있었다. 그건 남자의 목소리였다. 그리고 그 남자의 입에서 나온 말은 의심할 바 없는 중국어였다.

"집이야?"
- 당연하지. 시간이 몇 신데.
"옆에 누구 있어?"
- 진영아. 내가 나중에 다시 전화할게. 미안.

 전화는 갑자기 끊겨버렸다. 여보세요? 여보세요? 나는 멍하니 끊긴 전화를 내려다보았다. 그리고 생각했다. 남자의 정체에 대해. 집에 있는 게 당연할 시간에 지훈의 집에서 고함을 치고 있는 그 남자가 어떤 부류의 인간일지에 대해.

 "아저씨, 차 돌려주세요."

 급히 U턴을 하는 바람에 몸이 기울어 문짝에 닿았다. 두 손바닥 가득 힘을 주어 차 문을 밀어내며, 나는 갑작스런 U턴처럼 돌아온 불행에 대해 생각했다. 감각으로 먼저 느껴지는 불길한 기운과 안 좋은 상황에선 빗나간 적 없던 예감 같은 것들을.

 두 눈으로 직접 확인하기 전까지는 믿고 싶지 않은 잔인한 운명 같은 일들을.





 쾅쾅, 주먹으로 문을 내리치고 참을성 없이 지훈의 이름을 불렀다. 박지훈! 쾅쾅쾅. 누가 보면 떼인 돈을 받으러 온 빚쟁이인 줄 알았을 거다. 손이 얼어 단단한 철판으로 된 문짝에 닿을 때마다 몹시 아렸다. 그래도 나는 문을 두드리기를 멈추지 않았다. 박지훈! 박지훈! 지훈의 이름을 예닐곱 번은 부르고서야 찰칵, 하고 잠금쇠 돌아가는 소리가 났다. 열린 문 틈으로 나를 맞은 건 날카로운 인상을 한 큰 키의 남자였다. 급하게 옷을 입었는지 셔츠의 단추가 잘못 꿰어져 있었다.

 "누구야, 너."

 남자는 기가 차다는 듯 내 모습을 위아래로 훑고는 뭐라 욕을 씹어 뱉었다. 중국어였다.

 "이 새끼가."

 순간 욱하는 기분에 남자의 가슴을 거칠게 떠밀었다. 순식간에 남자의 몸이 중심을 잃고 뒤로 넘어갔다. 끝까지 넘어지지 않으려 팔을 휘젓는 바람에 손끝에 걸린 물건들이 우당탕 소릴 내며 바닥으로 떨어졌다.

 "뭐 이런 미친 새끼가 다 있...."

 남자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주먹이 나갔다. 퍽, 하는 소리와 함께 남자의 얼굴이 옆으로 크게 꺾였다. 어찌나 세게 때렸는지 현관문을 두드릴 때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손이 아렸다. 뼈가 산산조각나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한국말 잘하네? 한 대 더 맞으면 더 잘하겠지?"
 "배진영!"

 벌컥 방문을 열고 뛰쳐나온 지훈이 나를 보곤 놀란 얼굴로 소리쳤다. 그리곤 미처 두 번째 주먹을 내리꽂기도 전에 내 허리를 붙잡아 남자의 곁에서 떨어뜨렸다. 둔탁한 소리와 함께 나는 지훈을 껴안은 채 벽에 몸을 부딪쳤다.

 "관린아, 괜찮아?"

 지훈은 나를 내팽개치고 남자에게 달려가 물었다. 걱정스레 일그러진 얼굴을 살피는 모습이 낯설었다. 나는 언제나 지훈의 예외였는데, 지훈에게 가장 특별한 존재라 생각했는데, 지금 지훈의 안중에 나는 없었다.

 "이게 무슨 짓이야!"

 처음 보는 녀석의 앞에 서서 눈을 부릅뜨고 몰아붙이는 모습도 내게는 영 익숙지 않은 것이었다. 지훈이 나를 앞에 두고 화를 낸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빈 벽만 보았다. 남자는 내게 얻어맞은 뺨 한 쪽에 손바닥을 꼭 붙이고 비틀거리며 바닥에서 일어섰다. 욕을 하고 싶은데 너무 아파서 말하기조차 버거운 표정이었다. 그는 방으로 들어가 외투를 챙겨서는 밖으로 나왔다. 혹시나 다시 시비가 붙을까 염려되었는지, 지훈이 현관에 선 내 앞으로 스윽 몸을 움직였다.

 "비켜."

 남자는 지훈의 어깨를 세게 밀며 문을 박차고 나갔다. 뒷걸음을 치며 밀려난 지훈의 어깨가 내 가슴팍에 부딪쳐 찌르르한 통증을 남겼다. 기다려! 지훈은 반바지 차림으로 슬리퍼를 끌고 남자의 뒤를 쫓아 달려나갔다. 얼얼한 가슴을 문지르며 힘없이 벽에 기대 주저앉았다. 남자의 얼굴을 가격한 주먹보다 지훈의 어깨가 부딪친 가슴이 조금 더 아팠다.

 어지러진 집안을 바라보다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그리곤 조금 전까지 두 사람이 같이 있었던 방문 앞에서 걸음을 멈추었다. 왜인지 모르게 문을 열기가 조금 겁이 났다. 문을 열자 옅은 조명 아래 흐트러진 침구 위로 급하게 벗겨낸 듯한 지훈의 옷가지와 색색깔의 콘돔이 눈에 들어왔다. 방바닥엔 엊그제 지훈을 만났을 때 녀석이 입고 있던 커다란 사이즈의 야구 점퍼가 널브러져 있었다. 나는 두 손으로 남자를 밀쳐낼 때 느껴졌던 그의 몸피와 지훈보다 한 뼘은 더 커 보이던 그의 키를 떠올렸다. 그가 저 야구 점퍼를 입었을 때 어떤 모습일지를 상상했다. 지훈에게 자신의 옷을 벗어주는 모습과, 점퍼를 받아 들고 기쁘게 웃었을 지훈의 얼굴까지도.

 "진영."

 괴로운 상상을 깨뜨리는 침착한 목소리에 퍼뜩 정신이 들었다. 코와 귀가 빨개진 채, 지훈이 몸을 떨며 나를 노려보고 있었다. 안 그래도 추위에 약한 녀석인데 저런 차림으로 밖에 나갔다 왔으니 얼마나 추울지는 짐작하고도 남았다.

 "얼어 죽고 싶냐."

 둔한 몸동작으로 낑낑대며 외투를 벗어 건넸다. 싸울 때는 제법 날렵했는데 왜 이럴 때는 재빠르지 못한지. 팔 한쪽이 거꾸로 나와 있는 외투를 멀거니 바라보며 지훈은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뭐하자는 거야?"
 "춥잖아."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잖아."
 "넌 바보야."
 "술 마셨어?"

 도통 말이 되질 않는 대화다. 하고 싶은 말은 잔뜩인데 어디서부터 해야 할지 막막하기만 하다. 갈 곳 잃은 외투를 바닥에 아무렇게나 던지고 지훈의 눈을 보았다. 물결치듯 끝이 살짝 올라간 눈꼬리가 오늘따라 녀석의 인상을 뾰족하게 만들고 있었다.

 "저 녀석이 널 계속 괴롭혔다는 거 알아. 다 듣고 오는 길이야."
 "그런 적 없어."
 "거짓말 하지 마."
 "거짓말 아니야. 관린이는 나한테 아무 짓도 안 했어."
 "그럼 왜 만나주는 건데? 더는 사귀는 사이도 아니라며?"

 내가 말을 더 많이 하면 할수록 지훈의 표정은 딱딱하게 굳어져 갔다. 그 모습이 나를 더 화나게 했다. 나는 최소한 지훈이 잘못했다는 변명 정도는 할 거라 생각했다. 정말로 잘못한 게 없더라도, 잘못했다 생각하지 않는대도, 내게는 그래줬으면 했다.

 "이건 뭔데?"

 침대에 흩어진 콘돔을 집어 던지자 지훈은 일자로 입을 닫았다. 그래서 돌이킬 수 없게 되었다는 걸 깨달았다. 그 사실이 분해서, 나는 기어이 목청을 높여 소릴 지르고 말았다.

 "저 자식 좋아해?"

 말의 의미는 분명했지만 마음의 의미까지는 분명하지 않은 말이었다. 침묵은 블랙홀처럼 주변의 소음까지 빨아 당겼다. 잠자코 지켜만 보던 지훈은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답했다.

 "이건 내 프라이버시야. 그렇게 말하는 건 곤란해."

 젠장. 빌어먹을. 광포한 짐승처럼 날뛰며 나는 아무데에나 주먹질을 해댔다. 뭐 때문에 그렇게 화가 난 건지 스스로도 알 수 없었다. 보이지 않았다. 그날 이후로 우리 사이에 생긴 투명한 벽처럼. 분명히 존재하지만 눈에는 보이지 않는 감정이 우리 사이를 방해하고 있었다. 온통 모르는 것 투성이었지만, 그것만은 확실했다.

 "왜 그래? 너 도대체 나한테 왜 그래? 내가 너한테 큰 잘못이라도 한 거야?"

 벽장을 세게 발로 걷어차곤 참지 못하고 물었다. 말끝이 조금 떨렸다. 나는 울기 직전이었다. 억울하고 분했다. 좋아하지도 않는 사람은 잘도 받아주면서, 내 진심은 알아주지 않는 녀석이 미웠다.

 "너는 늘 분홍색을 싫어했어."

 취해서 잘못 들은 줄 알았다. 분홍색, 이라 말하는 지훈의 얼굴이 너무도 담담해서 나는 되물을 용기마저 잃고 말았다. 이런 상황에서도 녀석은 놀랍도록 침착했다.

 "남자가 남자답지 못한 것도 싫어했고, 남자가 남자를 좋아하는 건.... 정신병이라고 생각했지."

 지훈은 손을 뻗어 일그러진 내 얼굴을 가볍게 쓸었다. 그리곤 웃으며 어깨를 감싸 쥐었다. 넌 잘못이 없어. 그 말은 꼭 내 존재 자체가 잘못이란 것처럼 들렸다.

 "난 너의 나쁜 친구고 분홍색이 좋을 뿐이야."

 지훈은 눈웃음을 지었다. 마치 잘못한 건 자기 자신이라는 듯이.

 "걱정해서 그런 거지? 알아. 고마워. 하지만 다신 그러지 마."

 웃고 있었지만 상처받은 말투였다. 우스웠다. 주먹을 날리고 가슴을 채인 건 난데. 그만 꺼지라는 듯 녀석은 떨어진 외투를 주워 건넸다. 지훈이 그랬던 것처럼 나는 외투를 받지 않고 가만히 있었다.

 "슌."
 "내 이름은 박지훈이야."
 "그래, 지훈아."

 네가 그렇게 원한다면 네가 원하는 이름으로, 네가 좋아하는 색깔로, 그렇게 너의 곁에 있어줄게. 나는 외투를 받는 대신 주머니에 손을 넣고 뒤적거렸다. 그리곤 바깥 바람에 차갑게 식은 연분홍 립밤 케이스를 꺼내 들었다.

 "사람에겐 누구나 예외가 있어. 안 그래?"

 알잖아, 너도. 뒷말은 그냥 삼키고 말았다. 무슨 말인가를 하려 입을 벌린 지훈의 얼굴을 감싸쥐고 입술을 물었다. 고약한 술냄새가 퍼지는데도 지훈은 나를 밀쳐내지 않았다. 부드럽게 혀를 얽고 몸을 만지며 우리는 좀처럼 끝나지 않을 입맞춤을 이었다. 내 외투는 다시금 바닥에 버려졌다. 푹신한 외투 위로 립밤이 툭 떨어졌다. 뒤뚱뒤뚱 뒷걸음질을 치다 콘돔을 밟고 침대 위로 넘어졌다. 두 사람의 무게로 매트리스가 버거운 듯 삐걱이며 비명을 질렀다. 티셔츠를 끌어올리자 부드러운 속살 가득 향긋한 꽃내음이 피어 올랐다. 체열을 머금은 은은한 꽃향기가 산뜻했다. 간지럽게 코끝을 맴도는 제비꽃 향기에 취해, 나는 실없이 웃음만 흘렸다. 시간이 지날수록 나는 점점 더 깊이 취했고, 점점 더 충동적이 되었다.

 그렇게 우린 같은 색으로 물들어갔다.






 라일락. 장미. 벚꽃. 유채.

 오늘도 꽃들은 입술 위에서 핀다. 새로 나온 제비꽃 라인의 자리는 라일락 앞이었다. 제비꽃. 라일락. 장미.... 바뀐 순서를 새로 외우며 물건들을 가지런히 줄세운다. 크리스마스를 앞둔 시즌이라 재고함에는 평소 물량의 배가 되는 단상자가 쌓였다. 이걸 다 언제 치운담. 한숨을 쉬며 주저앉았다가 문득 입술을 만져본다. 까슬까슬한 느낌에 주머니에서 립밤을 꺼냈다. 내용물이 나올 때까지 돌돌 돌렸더니 탁, 하고 더 이상 돌아가지 않는다. 매일같이 썼더니 벌써 다 써버린 모양이다.

 "어? 밖에 눈 온다."

 크리스마스 트리에 알전구를 두르던 알바생이 잔뜩 흥분한 목소리로 눈소식을 알렸다. 반질반질 윤이 나게 닦은 통유리 바깥으로 팔랑팔랑 내리는 눈송이가 보였다. 내린 지 꽤 되었는지 점포 앞에 하얀 눈이 소복하게 쌓였다.

 "진영 씨, 눈 좀 치워주세요."

 혼자서 재고 정리하는 것만도 벅찬데 오늘따라 재수가 없다. 할 수 없이 네, 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제비꽃. 라일락. 장미. 벚꽃. 유채. 잊지 않으려 다시금 순서를 외우다 맨 앞자리에 선 제비꽃 향의 바디 로션을 집었다. 그냥 케이스를 만졌을 뿐인데 어쩐지 손끝이 간질거린다.

 "진영 씨!"
 "네, 지금 가요."

 잠시 머뭇거리다 제비꽃 바디 로션을 유채 뒤로 옮겼다. 선반 가장 깊숙한 위치라 눈에 잘 띄이지 않는 자리였다. 점장님께 들키면 눈물이 쏙 빠지도록 혼나겠지만 그깟 꾸지람, 듣고 말면 그만이었다. 삐져나오는 웃음을 숨기며 두꺼운 외투와 목도리로 단단히 중무장을 하고 빗자루를 꺼냈다. 쌓인 눈을 완벽하게 치우려면 냉동고 같은 길거리에 한참 나가 있어야 했다.

 눈은 치우기 무섭게 또 쌓이고 또 쌓이고 했다. 아무리 치워도 끝이 보이지 않아 암담했다. 계속된 비질에 허리는 점점 뻐근해지고 팔은 떨어져 나갈 것만 같았다. 이걸 언제 다 치우지. 궁시렁대고 있는데 지나가던 행인 하나가 빗자루 앞에서 걸음을 딱 멈추었다. 갈 거면 빨리 좀 비키지. 오도 가도 않고 멈춰선 운동화가 얄미워 슬쩍 고갤 들고 눈을 흘겼다.

 "벌써부터 일하는 거야?"

 애교가 철철 넘쳐 흐르는 새초롬한 눈웃음을 지으며 지훈은 살갑게 말을 걸었다. 박지훈. 니가 왜... 눈앞에 선 지훈의 모습을 보고도 믿기지가 않아, 나는 빗자루를 든 채 얼음처럼 굳어버렸다.

 "미안. 일하는데 방해해서."
 "아냐. 아직 오픈 전이라 괜찮아. 여긴 어쩐 일이야?"
 "그냥. 보고 싶어서."

 잠시 쉬었을 뿐인데 빗자루 위로 눈송이가 송송 맺히듯이 내려앉는다. 지훈은 발끝만 내려다보며 괜스레 떨어지는 눈송이를 턱 턱 걷어찼다. 부끄럼 많은 소년들이 그러는 것처럼.

 "봤으니까 갈게."
 "그냥 가게?"
 "지나가던 길이었어."
 "잠깐만!"

 나는 빗자루도 내던지고 떠나려는 지훈을 급하게 붙잡았다. 일단 붙잡긴 했는데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아무 생각도 나질 않았다.

 "이따 저녁 때 시간 있어?"

 아무렇게나 뱉은 말에 지훈은 얌전히 고갤 끄덕였다. 추위 때문인지 두 볼이 빨갰다. 나는 재차 확인하듯 되물었다.

 "그럼 우리 오늘 만날까?"

 아니, 나는 웃으며 머리를 털었다.

 "만나자. 꼭."

 환하게 밝아진 지훈의 얼굴을 보고서야 나는 내가 정답을 말했다는 걸 알았다. 우리는 바보들처럼 눈 내리는 길가에 서서 마주보고 웃기만 했다. 얼마나 추운지도 모르고. 운동화 위에 눈이 얼마나 쌓여가는지도 모르고. 빨갛게 물든 지훈의 두 뺨을 바라보다 목도리를 풀어 훤히 드러난 지훈의 목에 둘둘 감아주었다. 추위도 많이 타면서 왜 이렇게 옷을 얇게 입고 다니는 건지. 잔소리가 나오려는 걸 꾹 참고 야무지게 목도리 끝을 당겼다.

 "이따 만나면 돌려줘."

 지훈은 목도리에 폭 싸여 한결 포근해 보이는 얼굴로 밝게 웃음지었다. 그리곤 정말 가야겠다며 천천히 몸을 돌렸다. 때이른 크리스마스 캐롤과 흩날리는 눈발 속에 멀어지는 자그마한 등을 지켜보다 결심했다. 너에게 목도리를 선물해야겠다고. 네가 좋아할 만한 것으로. 너에게 아주 잘 어울리는 예쁜 색깔로.

 지훈이 남기고 간 제비꽃 향이 오목한 발자국 위로 사뿐 내려앉는다.







99와 00으로 연성한다는 게 얼마나 힘든 일인지 알게 된 시간들이었습니다. (오열)

ㅇㄴㅅㅍㄹ에서 알바하는 진영이를 상상하며 썼는데 의외로(?) 넘나 찰떡이라 기분 좋네요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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