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 투, 다시 원 앤 투 앤.... 아, 힘들다. 땀범벅이 된 수강생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다 잠깐 휴식을 외치고 생수병을 들었다. 아이돌 할 것도 아니고 뭘 그렇게 열심히 해요? 나이브한 물음에 수강생은 즐거워서요, 하고 웃으며 대답했다. 실력이 느는 걸 보는 게 즐거우니까 별로 힘든 줄도 모르겠다는 거였다. 그게 다 선생이 잘 가르친 덕분이라고, 진심 섞인 농담을 하고선 수업을 마쳤다. 즐거우니까. 마법 같은 말이다. 무엇이든 가능하게 만드는 마법 같은 말.


 처음 사귀었던 여자친구도 그런 말을 한 적이 있었다. 놀이공원에서 데이트를 했던 날이었다. 약속시간을 조금 넘겨 나타난 그녀는 꽤 신경 쓴 차림이었다. 키 차이를 줄여보고 싶었다며 신고 나온 노란색 구두가 상큼했다. 즐겁게 놀다가 집 앞까지 바래다주고 돌아설 때가 되어서야 나는 구두 때문에 그녀의 뒤꿈치가 다 까져 있다는 걸 알아차렸다. 피범벅이 된 발을 하고서도 그 친구는 웃고 있었다. 발은 괜찮은 거냐고 묻자 그녀는 놀란 듯 말했다. 너무 즐거워서 아픈 줄도 몰랐네. 하지만 어색한 미소에 어렴풋이 알 수 있었다. 좋은 분위기를 망칠까봐 아픈 걸 느끼면서도 쭉 참고 있었다는 걸. 그러자 그 애가 갑자기 무서워졌다. 좋았던 마음이 식은 것도 그때부터였다.


 그녀처럼 웃고 있었다. 어제의 나는. 다시 만난 지훈은 걱정했던 게 무색할 만큼 밝은 표정이었다. 새로 했다는 머리도 색이 밝아지고 곱슬곱슬해서 강아지처럼 귀여웠다. 지난번에 헤어질 때 미안한 일도 있었으니 소원이 있다면 들어주겠다고, 나는 보폭을 줄여 나란히 걸으며 말했다. 지훈은 조금 망설이다 오늘도 맛있는 거 해주면 안 되겠느냐고 물었다. 파스타에 그렇게 데이고도 또 그런 말을 하다니. 이해는 안 갔지만 고작 그런 게 소원이라는데 어떻게 해서든 들어주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냉장고에 있는 재료를 모두 때려넣은 볶음밥은 다행히도 파스타보다는 상태가 나았다. 맛이 있는지까지는 몰라도 최소한 사람이 먹을 정도는 되었으니까. 맛있어요. 예쁘게 말하며 지훈은 고맙게도 접시를 말끔히 비워주었다. 오늘 되게 덥다, 그치? 디저트로 아이스크림을 물고서 지훈의 옆에 치대고 앉아 TV를 켰다. 챔스 재방을 몇 번에서 하더라. 꾹꾹 힘주어 리모컨을 누르다 문득 지난주와 패턴이 비슷한 것 같단 생각이 들었다.


 "지훈이 너는 어떤 팀 좋아한다고 했..."


 차가운 입술이 다가와 남은 말을 녹였다. 진짜 안 그러려고 했는데. 오늘은 진짜 그러지 말자고 결심했었는데. 청포도맛 입맞춤에 굳건했던 다짐은 와르르 무너져내렸다. 아이스크림 막대를 꼭 쥐고서 먼저 입을 맞춰오는 지훈을 참아내는 건 불가능한 일이었다. 입술을 맞댄 채 목에 힘을 주어 밀자 지훈의 몸이 뒤로 넘어갔다. 보송보송한 솜털이 돋은 뒷목과 옴폭 패인 쇄골에 입을 맞추자 저절로 몸이 열리고 숨이 뜨거워졌다. 조금만 만져줘도 곧바로 반응하는 게, 그 모습을 보는 게 짜릿해서 멈출 수가 없었다. 그래서 도무지 헤어나올 수가 없었다. 달콤한 망각이었다. 지훈과 함께하는 동안엔 나는 의식적으로 아픔을 잊었다. 잊는 편을 택했다. 내다버린 양심이 피범벅이 되어가고 있는 것도 모르고.


 수업을 마치고 직원 휴게실 문을 열었다. 아무도 없을 줄 알았는데 안에서 대화소리가 흘러나왔다. 점심 때를 놓친 강사들 몇몇이 모여 김밥과 컵라면을 먹고 있었다. 같이 먹자고 권하는 걸 이따 약속이 있어서 됐다고 말하고 소파 끝에 앉았다. 그냥 쉬다 나갈 생각이었는데 거리가 너무 가까운 탓에 대화 소리가 고스란히 들려왔다. 자리에 없는 다른 강사에 관한 이야기였다. 입시 준비하는 수강생이랑 눈이 맞아서 사귀고 있는 것 같다고. 근데 여자애가 임신을 해서 결혼할지 말지 고민하고 있는 모양이라고. 비밀스런 이야기들은 김밥 씹는 소리와 국물 마시는 소리에 섞여 난잡하게 흘러들었다. 쓰레기 같은 새끼. 원색적인 비난과. 뭐 그럴 수도 있지. 무관심한 반응이 핑퐁처럼 오갔다. 사랑에 나이가 무슨 상관이 있나. 남자 강사가 두둔하고 들자 여자 강사들은 젓가락질을 멈추며 크게 야유했다. 그게 어떻게 사랑이에요? 애 데리고 장난질 하는 거지. 나중에 자기 딸이 그런 일을 겪는다고 생각해보세요. 비난이 거세지자 남자 강사는 말을 얼버무리며 김밥을 입에 넣었다.


 "근데 입시생이면 미성년자 아니에요?"
 "재수생이래. 그러니까 올해 스물."
 "그게 더 나쁘다. 스무살짜리 애를 데리고... 어휴, 그게 무슨 짓이야."


 듣다 보니 엉뚱하게 내 얼굴이 붉어졌다. 그럴 리 없는데 마치 비난의 화살이 나를 향하고 있는 것만 같아서였다.


 "강 선생은 어떻게 생각해요?"


 동의를 구하려는 듯, 여자 강사 하나가 뒤를 돌며 내게 물었다. 왜 불통이 나한테 튀는 건지. 난감한 마음에 허허 웃으며 머리를 긁었다.


 "뭐.... 서로 좋아하면 그럴 수도 있는 일이라고 생각은 하는데.... 제 주위에도 최근에 어린 친구랑 만난다는 녀석이 있는데 잘 지내더라고요."
 "에이, 강 선생은 젊잖아. 어린 친구라고 해봐야 한두 살 차이일 거 아냐. 여자 나이가 몇인데?"
 "열아홉이라는 것 같은데 확실하지는...."


 갑자기 이상해진 분위기에 말을 잘못 꺼냈다는 걸 깨닫고 입을 닫았다. 아무리 그래도 미성년자는 좀 그렇죠? 뒤늦게 웃으며 덧붙였지만 반응은 싸늘하기만 했다.


 "강 선생, 그거 범죄야."
 "....네?"
 "좀 그런 게 아니라, 미성년자랑 그러는 건 범죄라고. 성범죄."


 아. 벌어진 입에선 아무 소리도 나지 않았다. 나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풀 죽은 얼굴로 눈치를 보다 휴게실에서 나왔다. 서로 좋아하니까 괜찮을 거라 믿고 싶었는데. 내 생각이 짧았구나. 틀린 말이 아니라 억울한 생각조차 안 들었다. 지훈이 그런 일 하는 건 죽어라 싫어했으면서. 정말 그만두게 하고 싶었으면 나부터 멈췄어야 했다. 좋아한다 했으면서 나는 그저 말뿐이었다.


 아프다. 마법도 언젠간 풀리기 마련이란 걸, 너무 늦게 깨달은 대가였다.






 여섯신데도 해가 길어져 당황스러울 정도로 날이 밝았다. 한참 떨어진 거리에서도 몇 년 만에 만나는 얼굴을 쉽게 찾을 만큼. 우진아! 이름을 부르며 머리 위로 손을 흔들자 우진은 반가운 얼굴로 달려왔다. 마지막으로 봤을 땐 꼬맹이었는데 언제 이리 키가 컸노. 나는 어리벙벙한 얼굴로 훌쩍 커버린 우진의 모습을 몇 번이나 훑었다. 여전히 낯가림이 심하고 조금은 경직된 표정이었지만, 그 뒤엔 말도 안 되는 시크함과 까불까불한 기질이 숨겨져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키는 컸어도 그것만은 그대로였다.


 우진은 부산에 있을 때 같은 선생님께 춤을 배웠던 아는 동생이었다. 상경한 뒤론 자주 연락하지 않아 소식을 몰랐는데, 몇 달 전 서울에 올라오게 되었다며 우진이 먼저 연락을 해 근황을 알게 되었다. 우진은 꾸준히 춤을 추고 오디션을 보러 다니다 소속사를 찾았다는 것 같았다. 서울로 올라오게 된 것도 그 때문이라고. 아직 고등학생이다 보니 학교도 옮겨야 하고 이사 문제도 있어서 자릴 잡을 때까지 기다렸다가 이제야 만나게 된 것이다. 오랜만이라 서로 어색하지 않을까 했는데, 막상 만나고 보니 고향 사람을 만났다는 기쁨에 사투리가 마구 쏟아져나왔다. 우진이도 처음엔 쑥쓰러워하는 것 같더니 밥 먹으러 자리를 옮기자 이것저것 이야기를 꺼내기 시작했다.


 "힘들겠네. 서울살이하느라."
 "그래도 재밌어요. 배우는 것도 많고. 맛있는 음식도 많고."


 아보카도와 베이컨이 튀어나온 수제버거를 행복한 눈길로 바라보면서 우진은 덧니를 드러내며 활짝 웃었다. 몸만 컸지 아직 애 맞네. 감자튀김 하나를 쉐이크에 찍어 입에 넣고서 화제를 돌려 부산에 있던 동료들의 근황을 물었다. 완전히 춤을 그만둔 사람들도 있었고 크루를 결성해 활발히 활동 중인 사람들도 있었다. 한때 내가 속했던 댄스팀은 꽤 공신력 있는 대회에서 수상도 한 모양이었다.


 "형은 뭐하고 지냈어요?"
 "나? 나도 계속 춤췄지. 공연도 하고. 그걸로 밥도 벌어먹고."


 혹시 공연 영상을 볼 수 있느냐는 우진의 물음에 휴대폰을 꺼내 갤러리를 열었다. 그리곤 공연 실황을 찍어놓은 동영상을 찾아 손가락을 움직였다. 성우 형 친구가 공연을 보러 따라왔다가 찍어서 보내준 영상이었다. 급하게 화면을 넘기다 엉뚱한 걸 누르는 바람에 화면 가득 사진 한 장이 떴다.


 "아, 이거 아니다."


 황급히 얼버무리며 미친 듯이 돌아가기 버튼을 눌렀다. 엊그제 지훈이 자취방에 놀러왔을 때 도촬한 사진이었다. 예뻐서 나중에 또 보려고 몰래 찍어놨던 건데 하필 그걸 건드리다니. 아, 찾았다. 겨우 동영상을 발견하고 플레이 버튼을 눌렀다. 우진의 놀란 얼굴을 발견한 건 그 다음이었다.


 "아까 걔 박지훈 아니에요?"


 심장이 덜컥 내려앉는 것 같았다. 사진 한 장으로 우리 사이를 완전히 들켜버린 기분이었다. 나는 당황스러운 기색을 감추지 못한 채 더듬거리며 물었다.


 "니가 어떻게 지훈이를 알아?"
 "같은 학교 다녀요."


 별 거 아니라는 듯 기복없는 말투로 우진이는 쿨하게 대답했다. 같은 반이냐고 묻자 그건 아니라며 고개를 젓는다. 전학간 지 얼마 안 됐지만 워낙에 유명인이라 소문으로 들어서 알고 있다며. 우진은 나도 모르는 지훈에 대한 이야기들을 풀어놓았다. 지훈은 어릴 때부터 아역 활동을 시작해 광고도 찍고 예능에도 출연한 바 있는 방송인이었다. 연기만 해오다 방향을 바꿔서 아이돌 연습생으로 데뷔를 준비한 지 벌써 몇 년째라 했다. 학업과 일을 겸하다 보니 학교도 자주 빠지고 자연히 성적도 떨어졌던 모양인데, 언젠가부턴 데뷔 얘기가 싹 들어가서 연예인이 되길 포기한 것 같다는 게 주변 친구들의 말이라고. 급식실에서 얼굴 한 번 본 게 다지만 희망하는 진로가 같아서 흥미롭게 들었다며, 우진은 말을 마쳤다. 그렇구나. 놀라운 이야기에 어떤 반응을 보여야 할지 몰라 어색하게 대답하고 물잔을 들었다. 믿을 수 없었다. 믿기지 않았다. 우진의 입을 통해 전해들은 박지훈은 내가 알던 지훈과 전혀 다른 사람인 것처럼 느껴졌다.


 "그 얘기 누구한테 들었어?"
 "회사에 동생이 하나 있는데 그 친구한테 들었어요. 처음에 통성명 하면서 학교 이름 대니까 '아, 거기 박지훈 있잖아' 하면서 줄줄이 말해주더라고요."
 "믿을 만한 애야?"
 "네. 너무 발랄해서 가끔 정신없을 때도 있긴 한데, 없는 소리 하는 애는 아니에요. 연습생 기간이 길어서 다른 회사 소식에도 귀가 밝은 것 같더라고요."


 너무나 천진한 말투에 나 역시 그 말을 믿지 않을 수가 없었다. 다른 회사 연습생도 알 만한 유명인사가 지훈이라니. 내가 그런 아이랑 만나고 있었다니. 충격은 쉽사리 가시지 않았다. 무엇보다 충격이었던 건 그런 지훈이 우진과 같은 또래라는 새삼스러운 깨달음이었다. 나한테 우진이는 그냥 앤데. 너무 어려서부터 봐온 탓일까. 어떤 대답을 할지 알면서도 나는 굳이 한 번 더 확인하듯 물었다.


 "니가 올해 몇 살이지?"
 "열아홉이요. 맞다. 저 민증도 나왔어요."


 말을 마치기 무섭게 우진은 지갑에서 주민등록증을 꺼내 보여주었다. 사진 잘 나왔죠? 묻는 말에 뿌듯함과 자랑스러움이 공평하게 묻어 있었다. 고작 이런 거에 신기해하고 즐거워할 나인데. 이렇게나 어리구나. 열아홉은. 지훈이도 이렇게 어리겠구나.


 무슨 일이 일어난 걸까. 너에겐. 어디까지 몰라야 하는 걸까. 이런 나는.


 해가 저문 하늘 밑으로 하나 둘 네온사인이 켜진다. 불빛이 반사된 유리창에 비친 내 모습이 텅 빈 눈동자 속으로 흘러들었다.







쏟아지는 끄듀콘 플뷰 땜에 롬곡 대파티네여 ㅠㅠ
아무튼 ㅋㅋ 약속대로 빠르게 들고 왔습니다!
좀 정신없이 달린 감이 있어서 이제부턴 주 2회 연재로 가려고 생각중이에요.
다음 편도 열심히 써서 돌아올 테니까 기다려주세요 ㅎㅎㅎ
여러분들의 소중한 댓글은 저에게 정말 힘이 됩니다!
그냥 가시지 말고 몇 마디라도 적어주시면 더욱 감사해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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