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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짹윙] 2월

열아홉, 스물 - 겨울과 봄의 경계에서



 지긋지긋한 추위였다. 지은 지 오래된 대강당은 난방이 되지 않아 말을 할 때마다 마른 입에서 입김이 나왔다. 노란 교복 마이 위로 슬쩍 떡볶이 코트를 걸치자 에어컨 앞에 서 있던 학생주임이 기다렸단 듯이 눈을 부라린다. 치사하지만 오늘이 마지막이니까 내가 참는다. 속으로 딱 열까지만 세고 결국 코트를 벗었다. 아유, 이뻐라. 개나리밭 같네. 뒤에서 누군가 소리치며 웃는다. 개나리가 피기에는 아직 너무 이른 계절이 아닌가. 생각하며 교복 소매 안으로 손가락을 접어 넣는다. 색이 너무 유치하다고 학교 다니는 내내 싫어했는데 교복을 입는 것도 오늘이 마지막이라 생각하니 이상하게 아쉬워진다. 교복 같은 거 별로 소중한 물건도 아닌데. 아님 꽤나 소중했던 걸 여태 모르고 있다 이제야 깨닫게 된 걸까.

 "다음은 공로상 수여가 있겠습니다. 식이 많이 지연된 관계로 3학년 2반 박지훈 군이 대표로 받도록 하겠습니다."

 엉뚱한 생각을 하고 있다가 갑자기 이름이 불려 일어났다. 쏟아지는 눈빛들과 카메라 플래시에 눈앞이 다 아찔했다. 초중고 12년을 모두 합쳐 전교생 앞에서 상을 받는 건 처음 있는 일이었다. 좋긴 하지만 왜 하필 대표로 나 혼자... 어리바리하게 머리를 긁으며 단상에 올라 '개나리밭'을 등지고 섰다. 노오란 물결의 꼭짓점에서 박수를 받고 보니 병아리 대장이 된 것 같다. 유치하지만 좀 으쓱한 기분.

 "아유, 장해. 우리 아들."

 식이 끝나기 무섭게 엄마는 그 많은 인파를 헤치고 한걸음에 내게로 달려왔다. 나는 상장도 내던지고 잽싸게 떡볶이 코트부터 껴입었다. 옷도 입어야 하고 친구들과 인사도 해야 하고 엄마가 준 꽃다발도 받아야 해서 각각의 신체기관이 너무 바빴다. 정신이 없어 몰랐는데 엄마 옆에 아빠도 같이 있었다. 회사는 어쩌고 여기엘 왔냐고 물었더니 아들이 상 받는 걸 꼭 보고 싶었다며 연차를 썼다고 했다. 하여튼 유난은. 혀를 차면서도 기분은 좋았다.

 "어? 박우진!"

 교실로 올라가는 길에 익숙한 뒤통수가 보여 달려가 어깨를 쳤다. 우진은 얼떨떨한 얼굴로 날 한 번 보더니 엉뚱하게도 우리 엄마 아빠를 향해 고개를 꾸벅 숙였다. 누군지도 모르면서 아빠는 어, 그래, 하고 인사를 받았다. 그런 아빠에게 엄마는 귓속말로 우진이에 대해 일러주었다. 지훈이랑 제일 친한 친구라고. 고등학교 3년 내내 같은 반이었고 집에도 몇 번 놀러와서 밥을 먹인 적이 있다고. 들리지는 않았지만 아마도 그렇게 말했을 거다.

 "같이 사진 찍을래?"

 나는 우진이의 팔을 당기며 자연스레 옆에 붙어 섰다. 아빠는 기다렸다는 듯이 카메라를 꺼냈다. 손이 비어 있길래 빨간 장미 꽃다발을 내밀자 우진이는 영문도 모르고 꽃다발을 받아들었다. 하나, 둘, 셋! 아빠의 외침에 복도를 지나려던 아이들이 멀찍이 멈춰 선다. 이상한 날이다. 세상은 나를 중심으로 돌아가고 자꾸만 나는 주인공이 된다. 원하지도 않았던 일인데 어느 순간 그렇게 되어버렸다.

 "야, 꽃다발 가져가."
 "됐으니까 그냥 너 해."
 "왜?"
 "사랑하니까."

 씨익 웃으면서 윙크를 날리자 우진이의 표정이 살벌해진다. 솥뚜껑 같은 손을 들고 위협하길래 얼른 엄마 아빠한테 달려가서 겨우 살았다.

 "우진이는 졸업식 끝나고 뭐하니?"
 "저 이모랑 같이 밥 먹기로 했어요."

 이모가 오셨어? 놀라 묻자 우진이는 '그게 아니라' 하며 머리를 긁었다. 얘기를 들어보니 졸업식엔 못 오셨지만 점심시간에 짬을 내어 식사만 같이 하기로 약속했단다. 워낙에 회사 일로 바쁘신 분이니 그게 최선이었을 것이다. 뭐 먹기로 했는데? 일부러 천진하게 묻자, 졸업식엔 당연히 짜장면이 아니냐며 되려 면박을 준다.

 "점심 먹고 배그나 할래?"
 "어.... 글쎄. 저녁엔 어때?"
 "안 되는데. 알바 있어서."

 오늘 같은 날에도 우진이는 알바를 가는구나. 나는 아쉬운 표정으로 아빠의 얼굴과 우진이의 얼굴을 번갈아 보았다. 그래도 나 때문에 연차까지 쓰셨다는데. 망설이다 그냥 다음에 놀자고 말하자 우진이는 어깨를 으쓱하며 쿨하게 포기했다.

 "연락해."

 나는 엄지와 새끼를 세우고 손가락을 접어 귓가에서 흔들며 우진이 등에다 대고 외쳤다. 요란하게 깨방정을 떨었는데 우진이는 못 들은 것 같았다.

 그래도 돌아는 봐주지. 나는 우진이를 따라 어깨를 으쓱했다. 박지훈! 뒤에서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친구들이 같이 사진을 찍자며 몰려들었다. 빈 손으로 브이를 그리다 문득 허전한 기분이 들었다. 아마도 박우진이 내 꽃다발을 가져가서 그런 것 같았다.





 학교는 늘 재미가 없었다. 교복을 입기 전까진 그래도 그럭저럭 다녔던 것 같은데 중학교에 올라가고부턴 지루한 수업도 딱딱한 학교 분위기도 영 체질에 맞지 않았다. 이대로는 공부와 담을 쌓고 지내게 될 거란 걸 직감한 나는 사교육의 도움을 받아 내 적성을 찾아보기로 마음먹었다. 동네에 있는 거의 모든 학원이란 학원은 다 다녀봤지만 어떤 걸 배워도 두 달을 넘기기가 힘들었다. 불운하게도 내겐 운동선수가 될 만한 체력도, 가수가 될 만한 음악성도 없었다. 유일하게 티끌만큼 있는 재능 비슷한 거라곤 지치지도 않고 온갖 종류의 게임을 하는 것뿐이었다.

 보다 못한 엄마는 방학이 되자마자 일 때문에 강원도에 처박혀 있던 외삼촌에게 부탁해 나를 방학 내내 그곳에 맡겨버렸다. 외삼촌은 연예기획사에서 일하다 독립해 프로덕션을 꾸린 뒤 밤낮 없이 일을 하느라 정신이 없던 차였다. 나는 바쁜 외삼촌 대신 모텔 방을 청소하고 빨래를 맡기고 생수와 김치가 떨어지지 않게 냉장고를 채우고 모텔 주인이 키우는 강아지와 놀면서 하루하루를 보냈다. 컴퓨터도 게임기도 없는 모텔 방에선 그런 것 말고는 딱히 중학생이 할 만한 일이 없었다. 그러다 나중엔 극도의 지루함을 참지 못하고 동네 마실을 나가거나 외삼촌이 일하는 현장에 찾아가 영화를 찍는 걸 구경했다. 마침 단역이나 엑스트라가 펑크나면 대신 땜빵을 하기도 했다. 외삼촌은 옳다구나 하고 나를 여러 번 공짜로 써먹었다. 떡볶이도 사주고 용돈도 줬으니까 아주 공짜는 아니고 헐값이었다 치자. 아무튼 그렇게 몇 번 단역 일을 하다 보니 이왕 배경이 될 거면 좋은 배경이 되고 싶단 생각이 들었다. 집에 돌아오자마자 나는 엄마에게 연기학원에 보내달라고 했다.

 연예인이 될 거냐고들 했다. 배우보다는 아이돌이 낫지 않겠느냐고. 연기 잘하는 아역 출신 애들이 얼마나 많은데 실력이나 외모나 그 정도로는 힘들 거란 말도 많이 들었다. 사람들의 말을 나는 도통 이해할 수가 없었다. 나는 송강호나 황정민 같은 배우가 될 생각이 요만큼도 없었다. 꾸준히 연기를 배우며 연극 무대에 서고 뮤지컬도 해보고 TV 시트콤에도 출연했지만 그건 연기가 너무 재밌고 좋아서가 아니라 학교에 가는 것보단 나아서였다. 열다섯 즈음의 나는 그렇게나 단순하고 대책없고 몹시도 어렸다. 내일을 걱정하기보단 오늘만 잘 넘겨보자는 안일한 태도로 3년을 흘려보낼 만큼. 고등학교 입시를 앞두고 엄마는 나를 예고에 보내고 싶어 했지만 정작 당사자인 나는 머뭇거렸다. 공부가 싫어 취미처럼 하던 일이 직업이 된다면 어디로 도망쳐야 하는 걸까. 배경이 아닌 주인공의 삶을 살기 위해 애쓰며 버둥거리는 일은 상상만으로도 피로하고 답답했다. 결국 예고 입시는 없던 일이 되었고 나는 인문계 고등학교로 진학했다. 엄마는 끝까지 아쉬워 했지만 내겐 아무런 미련이 없었다. 연기 학원을 다니며 친해진 친구들을 더는 볼 수 없게 되어서 그게 좀 섭섭할 따름이었다.

 고등학교 생활은 중학교 때에 비하자면 열 배는 더 지루했고 백 배는 더 답답했다. 중학교 내내 촬영을 핑계로 학교에 잘 나가지 않은 탓에 수업은 따라가기가 벅찼고 아는 친구도 없었다. 체육시간에 짝을 지어 2인 1조를 만들라고 했을 때도 짝꿍을 못 찾아 출석번호 바로 앞인 녀석과 한 팀이 되어야 했다. 웃긴 건 그 녀석도 나처럼 친구가 없어 외톨이 신세였단 것이다. 어색한 서울말 중간중간에 탄산 같은 경상도 사투리를 섞어 말하던 그 녀석이 바로 박우진이었다. 그날을 계기로 우리는 무서울 만큼 빠른 속도로 친해졌다. 자의 반 타의 반으로 둘 다 왕따 신세였다 보니 당연하다면 당연한 일이었다.

 처음엔 조용하고 말도 없어서 그냥 내성적인 애라고만 생각했는데 친해지고 보니 박우진은 완전 까불이에 흥부자였다. 특히 체육시간만 되면 아예 다른 사람처럼 성격이 바뀌었다. 구기운동에 도통 소질이 없던 내게 축구며 농구를 가르쳐준 것도 박우진이었다. 아무리 가르쳐줘도 발전이 없어서 결국엔 포기하고 같이 PC방이나 다니는 사이가 됐지만 아무튼. 하늘이 도운 건지 우진이와 나는 3년 내내 같은 반이었고, 해를 거듭할수록 더 가까워졌다. 같이 밥도 먹고 매점도 가고 게임도 하고 아주 가끔은 시험 공부며 숙제도 함께 하면서.

 우진이의 고향은 부산이었다. 부모님은 두 분 다 부산에서 일을 하시고 우진이만 혼자 서울에 올라와 이모집에 얹혀 살며 학교엘 다녔다. 수도권 대학에 가기 위해 교육환경이 좋은 서울로 일종의 유학을 온 것이었지만, 부모님의 깊은 뜻과 달리 우진이는 하필이면 나 같은 친구를 만나 공부 대신 게임만 열심히 했다. 그래도 언제나 성적이 좋았다. 눈치가 빠르고 집중력이 좋아서 같은 걸 배워도 나보다 잘 이해하는 듯 싶었다. 그래서 일찌감치 대학을 포기한 나와 달리 어떻게든 4년제 대학에는 갈 거라 생각했다. 그러니까 인생은 정말 모를 일이란 거다. 그렇게 머리 좋은 박우진은 대학에 못 가고 가망 없던 나 같은 게 대학에 붙었으니 말이다.

 반 전체가 돌아가며 담임과 입시 상담을 하던 기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쉬어가는 코너 정도로 생각했던 내 차례에 담임은 뜻밖의 이야기를 꺼냈다. 계약이 되어 있어서 어쩔 수 없이 1학년 때 출연했던 뮤지컬과 마지막으로 찍었던 지면 광고로 대학에 갈 수 있다는 거였다. 그런 시시한 걸로도 지원이 가능한 대학이라니. 진짜로 갈 수 있다 해도 별 대단치 않은 곳일 거란 생각이 들었지만 의외의 기회에 그럼에도 기뻤다. 부모님 역시 연예계 생활을 하지 않아도 상관없으니 대학만큼은 나왔으면 좋겠다며 나를 설득했다. 급하게 수시를 준비해 원서를 넣고 실기 시험을 쳤다. 결과는 놀랍게도 합격이었다. 반면 수능을 망친 우진이는 원하던 대학 입시에 모조리 실패했다. 그 중에는 원서조차 못 넣어본 곳도 있었다.

 달라진 것은 없었다. 공부엔 관심도 없던 내가 대학엘 붙고 우진이는 졸지에 재수를 해야 할 처지가 됐지만 우리 사이에 변한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속으론 미안하고 머쓱한 마음도 있었지만 열아홉 사내애들이 다 그렇듯 그런 걸 입 밖으로 꺼내는 건 너무 간지러운 일이었다. 우리는 이전과 다름없이 PC방에서 만나 라면을 먹으며 옵치나 배그를 했다. 우진이 알바 있는 날 빼고는 거의 매일 만났다. 영화를 볼 때도 있었고 치킨을 먹을 때도 있었지만 어쨌든 우린 함께였다. 언제까지고 이렇게 살 수 없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늘 생각은 그쯤에서 그쳤다. 중학교 3년을 그랬던 것처럼 나는 내일을 걱정하기보단 오늘의 기쁨에 충실했다. 어떻게든 되겠지 싶었다. 내가 대학에 가고 우진이가 재수를 시작해도 그래도 우리는 어떻게든 만나서 히히덕거리고 같은 시간을 보내며 우정을 이어갈 거라고. 그러길 바랐다. 오늘이 오기 전까지는. 정말로 졸업이란 걸 해버리기 전까지는.

 카톡, 경쾌한 알림음과 함께 잘게 쪼개진 진동이 물결처럼 번진다. 우진인가 싶어 얼른 확인했더니 단톡방이다. 2학년 선배가 최종합격한 예비신입생들을 단체방으로 초대해 공지사항을 전달하고 있었다. 분명히 연락하라고 했는데 그걸 까먹나. 계속 진동이 오는 걸 무시하고 단톡방을 나왔다. 화가 나서 박우진과의 대화창에 야, 하고 적었다가 보내진 못하고 그냥 지웠다. 생각해보니 우진이 알바하고 있을 시간이었다. 얘는 빨리 재수학원이나 알아볼 것이지 알바는 무슨 알바야. 애먼 곳에 화풀이를 해도 여전히 기분은 별로다.

 그깟 게임 한 판 같이 못하게 만들고. 이유 없이 박우진이 밉다. 아마 우진이도 그러할 것이다.




 이상하게 바쁜 일주일이었다. 등록금을 내러 엄마와 같이 학교에 가고, 옷이며 가방이며 이것저것 사느라 돌아다니고, 그밖에도 기숙사 신청이나 수강신청 따위를 알아보느라 하루하루가 어떻게 가는지도 모르게 정신이 없었다. 우진이랑은 매일 연락했지만 서로 시간이 맞지 않아 놀기는커녕 얼굴 한 번 보지 못했다. 나야 그렇다 치지만 저녁 알바밖에 안 하면서 박우진은 뭐가 그리 바쁜 건지 내가 만나자고 할 때마다 약속을 튕겼다. 사정이 있겠지 이해하려 노력하면서도 나는 내심 비싸게 구는 우진이 서운했다. 알바비 받았다며 맛있는 거 사줄 테니 나오라고 하지만 않았어도 이번엔 내가 먼저 튕겼을 거다.

 "지훈아."

 오랜만에 듣는 목소리였다. 잠시 삐쳐 있던 것도 잊고 나는 반갑게 뒤를 돌아보았다. 내 이름을 그렇게 부를 수 있는 건 우진이밖에 없었다. '박지훈'이 아니라 '지훈아'라고 하는, 독특한 억양의 그 목소리. 추워. 별로 춥지도 않은데 나는 인상을 찡그리며 주머니 깊숙히 손을 찔러넣었다.

 "야, 니가 먼저 보자고 해놓고 왜 늦어."
 "일이 좀 있어서. 오래 기다렸어?"
 "몰라. 나 배고파."

 우진이는 피식 웃더니 알겠다며 앞장서 걸었다. 그리곤 항상 다니던 학교 후문 쪽 골목길을 지나쳐 지하철 역 근처 번화가에서 걸음을 멈췄다. 각종 술집과 유흥업소가 밀집되어 있어 학교 다닐 땐 좀처럼 올 일이 없는 길이었다. 씩씩하게 길을 찾는 우진이 뒤에 붙어 건물 계단을 올랐다. 문을 밀고 들어가자 입구에서부터 고소하고 달큰한 냄새가 확 풍겼다. 메뉴판에 적힌 상호가 어쩐지 낯익다 했더니 감각적인 인테리어와 먹음직스러운 플레이팅으로 인스타에 자주 올라오던 함박스테이크 가게였다. 한 번쯤은 와보고 싶었던 덴데 어떻게 안 건지 신기했다.

 "진짜 니가 사는 거야?"
 "당연하지."
 "그럼 난... 음... 이거랑 이거 먹고 싶은데."
 "돼지야, 두 개나 먹으려고?"
 "죽는다."
 "먹을 게 그렇게 좋냐?"

 어처구니 없다는 듯이 고개를 절레절레 젓더니 우진이는 손을 번쩍 들고 로봇 같은 서울말로 '저기요'를 외쳤다. 데미그라스 함박이랑 크림소스 함박, 그리고 콜라 두 잔. 돼지라고 놀릴 땐 언제고 내가 먹고 싶다고 한 것만 골라 주문한다. '저기요' 하던 우진이 말투를 흉내내며 장난치다 보니 금방 음식이 나왔다. 포크로 작게 잘라 맛을 보니 둘 다 맛있었지만 데미그라스가 조금 더 내 입맛에 맞았다. 우진이는 접시를 바꿔 내 앞에 데미그라스 함박을 놓아주곤 크림소스 함박도 한 점 크기로 먹기 좋게 썰어두었다. 나는 오로지 고기를 찍어 입에 넣고 씹어 삼키는 일에만 온 신경을 집중했다. 한참을 신나게 먹다가 뒤늦게 '사진 찍을 걸'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이미 접시는 깨끗해진 뒤였다.

 "천천히 먹어라. 누가 안 훔쳐 먹는다."
 "그게 아니라, 빨리 먹고 게임하러 가려고 그러지."
 "게임? 오늘 PC방 안 갈 건데."
 "야, 무슨 소리야. 내가 오늘 너를 왜 만나러 나왔는데."
 "왜 나오긴. 밥 사준다고 하니까 나온 거 아냐?"
 "뭐 그런 것도 있지만... 일주일 넘게 게임을 못 해서 나 지금 죽을 것 같단 말야."
 "아, 안 되는데. 게임 말고 다른 거 할라 그랬는데."
 "다른 거 뭐?"
 "그냥 뭐... 커피나 한 잔 하든가 아니면 맥주라도 마시면서 얘기 좀 할라 그랬지."

 안 어울리게 어른 흉내는. 커피고 맥주고 다 쓰기만 하고 맛도 없는 걸. 돈 아깝게 그게 무슨 짓이냐며 내가 정색을 하자 우진이는 한숨을 쉬더니 알겠다 말했다. 계산서를 들고 카드를 긁는 우진이 뒷모습을 바라보는데 좀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왜 혼자 어른인 척 하려고 그러지. 하지만 PC방 가자는 우진이의 말에 잠시나마 품었던 의심은 가루처럼 흩어졌다.

 기대했던 것에 비해 게임은 재미가 없었다. 오늘은 치킨 좀 뜯나 했는데 말도 안 되게 두 번 연속으로 레드존이 떠서 죽고 마지막엔 뒤치기를 당했다. 평소답지 않게 우진이가 뒤를 잘 못 봤다. 한 판 더 할까 하다가 흥이 식어서 이쯤에서 그만하기로 했다. 밖으로 나오니 바람이 무척 매서웠다. 이제 뭐하지. 시계를 보니 9시였다.

 "좀 걸을래?"

 이대로 집에 들어갈 줄 알았는데 이런 날씨에 우진이는 걷자고 했다. 그리곤 집과는 반대쪽으로 바람을 뚫고 걷기 시작했다. 학교 방향이었다. 설마 했는데 우진이는 진짜로 학교 안으로 들어갔다. 졸업도 했는데 이 시간에 학교엘 왜. 이상한 게 한두 가지가 아니었지만 왜냐고 물어도 우진이는 '그냥'이라고만 했다. 겨울밤 아무도 없는 학교 운동장은 잠긴 것처럼 고요하고 스산했다. 잠깐만 있다 가자며 우진이는 조회대 앞 계단에 털썩 주저앉았다. 옆에 따라 앉고 보니 앉은 자리가 익숙했다. 체육시간에 우진이랑 처음으로 짝이 되어 스트레칭을 했던 바로 그 자리였다.

 "무슨 말인지는 몰라도 내일 하면 안 되냐? 아님 톡으로 보내든가."
 "왜, 추워?"
 "추운 것보다... 무서워."

 나도. 우진이는 들릴락 말락한 소리로 작게 대꾸했다. 바람 소리를 잘못 들은 건지도 몰랐다. 휑휑한 침묵이 한 뼘 거리의 무릎 사이로 내려앉았다.

 "나 내일 부산 가."

 부산? 갑작스런 이야기에 나도 모르게 큰 소리로 되묻고 말았다. 참, 내일부터 설 연휴였지. 설이라 집에 가는구나. 명절에 집에 가는 건 당연한 건데 왜 그 생각을 못했는지 모르겠다.

 "그럼 언제 올라와?"
 "모르겠어."
 "KTX 타고 가는 거 아냐? 왕복표 안 끊었어?"
 "지훈아."

 특유의 억양으로 내 이름을 불러놓고 우진이는 한참 말이 없었다. 불 꺼진 학교보다 나는 그게 더 무서웠다. 내 이름을 불러놓고 아무 말이 없는 우진이의 낯선 태도가. 음, 하고 길게 뜸을 들이더니 우진이는 겨우 입을 떼어 말을 이었다.

 "이번에 가면 아주 가는 거야. 당분간은 서울에 안 와. 벌써 짐 정리도 끝냈고 알바도 그만뒀어."
 "뭐?"

 놀라서 절로 목소리가 높아졌다. 나는 몸을 틀어 온몸으로 우진이를 응시했다. 거짓말이라면 너무 고약한 장난이었다.

 "너 대학은? 재수학원 다닐 거라며."
 "재수 안 해. 대학은 안 가려고."
 "대학에 안 가면 뭐 해?"
 "부모님 일 도와드리든가, 아님 뭐 다른 일 찾아보든가 해야지."

 그런 말을 담담하게 하는 우진이의 모습에 나는 더할 수 없이 충격을 받았다. 진짜 어른이 되어버린 것 같았다, 우진이는. 그래서 왜 그런 결심을 한 거냐고 묻고 싶었지만 물어볼 수가 없었다. 내가 질문을 던질 때마다 우진이의 입에선 점점 더 엄청난 말들이 쏟아졌다. 그게 너무 두렵고 겁이 났다.

 "그걸... 그걸 왜 이제서야 말해?"
 "니가 계속 바빴잖아."
 "그래도 좀 더 일찍 말해줬어야지."
 "그러게."
 "그러게?"
 "좋아한다고. 그 말을 하고 싶었어."

 어...? 나는 멍청하게 되묻곤 그대로 얼어버렸다. 놀란 눈으로 우진이의 얼굴을 살폈지만 장난 같진 않았다. 제대로 눈도 못 마주치고서 우진이는 긴장해 떨리는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어색해질까봐 계속 망설였는데 이렇게 보는 것도 어쩌면 오늘이 마지막이니까."

 덧니가 보일락 말락하게 입꼬리를 당겨 웃으며 비로소 우진이는 내 눈을 보았다. 나는 황급히 시선을 돌렸다. 어째선지 이젠 내가 우진이를 똑바로 바라볼 수가 없었다.

 "나는... 나도 니가 좋긴 한데... 그치만 그건..."
 "알아. 무슨 뜻인지."

 어색함을 감추기 위함인지 우진이는 '그냥' 웃었다. 어떻게 웃지. 이런 상황에서 어떻게 저렇게 웃을 수가 있지. 오늘의 박우진은 정말 이상했다. 껍데기만 박우진이고 다른 사람이 들어와 말하고 있는 것 같았다.

 "이거, 선물."

 우진이의 커다란 손이 외투 주머니에서 작은 상자를 꺼냈다. 앙증맞은 빨간 리본이 모서리에 걸린 정사각형 크기의 종이박스였다. 나는 머뭇거리다 우진이가 꺼낸 상자를 받았다. 받긴 받았는데 열어볼 엄두까진 안 났다. 열었는데 안에 반지나 목걸이 같은 게 들어 있으면 어쩌지. 갑자기 사귀자고 하면 나는 무슨 말을 해야 하는 걸까. 원망 섞인 마음으로 남의 물건처럼 어정쩡하게 상자를 들고 어쩔 줄을 몰라 하자 우진이는 지켜보다 못해 쿨하게 바지를 털며 일어섰다.

 "가자. 집까지 데려다줄게."

 다행스런 마음과 여전히 불안한 마음이 뒤섞인 채로 나는 우진이를 따라 일어섰다. 그리고 평소보다 조금 떨어진 거리에서 말 없이 길을 걷기 시작했다. 어색함 때문에 자꾸 가게 간판을 곁눈질하면서. 둘이 자주 가던 패스트푸드 가게와 인형뽑기 기계, 방금 전 들렀던 PC방과 함박스테이크 집이 차례로 우리를 지나쳤다. 그럼 이제 우진이랑 둘이서 저기에 가는 일은 없는 건가. 어쩌면 단둘이 걷는 것도 이게 마지막이겠구나. 깨달음은 조금씩 느리지만 분명하게 나를 흔들었다. 비로소 알 것 같았다. 지금 이 시간이 얼마나 소중한지. 내게 박우진이 어떤 존재였는지. 유치하고 익숙했던 교복처럼. 여태 모르고 있다 이제서야.

 "들어가."

 아파트 현관에서 새어나온 불빛이 우진이의 얼굴 반쪽을 밝혔다. 분명히 1학년 땐 키가 비슷했는데 언제 그렇게 키가 컸는지 마주보고 서니까 시선이 위로 향한다. 우진이에 대해선 다 알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그건 내 착각이었다. 나는 내가 알고 싶은 것만 알았다. 내가 모르던 우진이의 반쪽은 아직 어둠 속에 가려 있었다.

 "우진아."
 "응?"
 "우리 아직 좋은 친구인 거 맞지...?"

 그런 말은 안 하는 게 좋았을 텐데. 어른이 되어버린 우진이와 다르게 난 아직도 어리고 게으르고 이기적이었다. 내가 알던 것만 계속 알기를 원했다. 그렇다고, 아까 한 말은 그냥 잊어버리라고, 우진이가 그렇게 말해줬으면 했다.

 "잘 지내."

 내 이기적인 바람과 달리 우진이는 쓸쓸한 인사를 남기고 가버렸다. 비현실적인 퇴장이었다. 찬바람에 손끝이 어는 것도 상관 않고 우진이가 멀어져가는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그렇게 멍하니 서 있다가 우진이가 준 상자를 열어보았다. 안에 든 건 반지도 목걸이도 열렬한 러브레터도 아닌 예쁘게 포장된 초콜릿이었다. 상자 겉면에 'Happy Valentine'이라 적힌 것이 보였다. 오늘 발렌타인데이였구나. 또 한 번 깨달음은 뒤늦게 찾아왔다. 아무 것도 모르고 떼만 쓰던 내 모습과 그 바람에 수많은 말들을 삼켰던 우진이의 모습이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갔다. 비로소 전하지 못한 우진이의 남은 말들이 궁금했다. 내가 모르던 우진이의 다른 반쪽이.

 아까워서 먹을 수나 있을까. 매끈하게 반짝거리는 초콜릿을 바라보다 그대로 상자를 닫았다. 그냥 두는 것 말고는 아무 것도 할 수가 없어서 답답했다. 이젠 그만 인정해야 할 때였다. 어떻게 해도 예전과 같을 순 없을 거란 걸.




 2월 내내 지속되던 추위가 수그러들고 모처럼 하늘이 맑은 날이었다. 꽃다발을 들고 사진 찍기에 좋은 그런 날. 활짝 웃고 브이를 그리면 누구나 주인공이 될 수 있을 바로 그런 날.

 조금 이른 입학식이었다. 다음날 단과대학 OT가 예정되어 있어 일정을 맞추다 보니 그리 된 듯했다. 그럴 필요 없다고 했는데도 아빠는 또 연차를 내서 입학식에 따라왔다. 진짜 됐다고 했는데도 엄마는 동네 꽃가게에서 제일 비싸고 화려한 걸로 꽃다발을 맞췄다. 새로 산 울코트를 입고 길이 덜 든 구두를 신고 통유리가 나올 때마다 이리저리 내 모습을 비춰 보며 단과대학 입학식이 열리는 체육관으로 향했다. 일부러 조금 일찍 도착했는데 체육관은 벌써부터 사람들로 북적였다. 부모님과 헤어져 신입생 지정석에 앉아 눈치껏 주변을 둘러보았다. 대부분의 아이들이 조용히 휴대폰만 들여다보고 있었지만 그 중 몇몇은 가까운 사이인 듯 즐거운 표정으로 담소를 나누고 있었다. 같은 고등학교 출신인가. 아니면 벌써 친해진 건가. 갑자기 입술이 마르고 속이 답답해온다. 지훈이가 대학엘 다 가다니 기특하다며 아빠가 점심으로 사준 양념갈비가 얹힌 모양이었다. 혹은 3년 주기로 찾아오는 외로움이 되풀이되는 건지도 몰랐다. 그래서 별 수 없이, 결국엔, 박우진이 생각나고 말았다.

 발렌타인데이에 만난 뒤로 우리는 서로 연락을 하지 않았다. 변명 같지만 무슨 말이든 내가 먼저 말을 걸면 그게 '승낙'의 의미로 읽힐까봐 두려워서 말을 붙이기가 어려웠다. 부산에 내려가면 저쪽에서 먼저 연락을 할 줄 알았는데 괘씸하게도 일주일이 넘어가도록 감감무소식이었다. 내가 그 좋아하는 게임도 안 하고 집에 틀어박혀 시무룩해 있자 걱정이 되었는지 엄마는 나를 채근해 우진이가 부산에 내려갔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그리곤 우진이네 이모와 통화해 그보다 더 자세한 사정까지 전해 듣게 되었다. 작년 여름쯤이었다고 했다. 우진이네 아버지가 운영하는 회사가 힘들어진 건. 시간이 지나면서 상황은 급격히 나빠졌고 덩달아 우진이의 모의고사 성적도 떨어지기 시작했다. 수능을 망치게 된 것도 아마도 그래서였던 것 같다고 엄마는 혀를 차며 말했다. 우진이네 부모님은 끝까지 우진이 뒷바라지를 해줄 생각이었지만 본인의 의사가 너무 확고해서 돌아오겠다는 걸 말릴 수가 없었다고도 했다. 그래도 우진이는 야무진 아이니까 결국엔 잘 될 거야. 엄마는 이치에 닿지 않는 말로 나를 위로하려 애썼다. 위로 받아야 할 사람은 내가 아니라 우진인데 말이다.

 나쁜 놈. 그런 말은 한 마디도 안 해주고. 이상한 소리나 하고 가버리고. 베프를 잃은 슬픔을 나는 그런 식으로 풀었다. 죄 없는 우진이를 탓하고 내 몫 아닌 죄책감을 느끼면서. 자주 그리웠다. 지훈아, 하거나 돼지야, 하는 우진이의 목소리가. 덧니가 보일락 말락한 웃음이. 쥐어박을 듯 겁만 주고 정작 내 몸엔 아프게 닿지 않던 커다란 손과 유난히도 아스라했던 마지막 뒷모습이. 솔직히 아직도 실감이 안 났다. 더는 우진이가 내 곁에 없다는 게.

 휴대폰이 짧게 울더니 톡창이 떴다. 엄만가. 심드렁하게 화면을 밀자 웬 꽃다발 사진이 보였다. 바싹 말라 생기를 다 잃은 시들시들한 꽃다발이었다. 이게 뭐지. 대화 상대 이름을 확인한 순간 눈이 저절로 커졌다. 우진이였다. 잘못 봤나 싶어 프로필 사진과 이름을 거듭 확인했지만 진짜 우진이가 맞았다.

 - 졸업식날 니가 준 건데 기억나? 잘 말려서 내 방에 걸어뒀어. 예쁘지?

 미친놈. 오랜만에 연락해선 또 이상한 소리나 하고 있고. 속에선 욕이 나오는데 얼굴은 웃고 있고 왈칵 눈물이 날 것도 같았다. 나는 엄지와 검지를 벌려 우진이가 보내준 사진을 확대해보았다. 생그럽던 모습은 어디론가 사라지고 먼지 먹은 색으로 빳빳해진 장미 꽃다발이 흰 벽에 덩그러니 걸려 있었다. 그냥 버리면 되지 이런 걸 뭐하러 부산까지 가져가고.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한편으론 마음이 쓰렸다. 바래진 꽃잎 한 송이 한 송이가, 그게 꼭 우진이 마음인 것만 같았다.

 - 난 다 먹어버렸는데. 니가 준 초콜릿.

 거짓말이었다. 우진이에게 받은 초콜릿을 나는 건드리지도 않고 그대로 서랍 속에 넣어 보관하고 있었다. 왜 그런 거짓말이 나온 건지는 나도 몰랐다. 그래도 다 먹었다고 해야 할 것 같았다. 그래야 우진이가 웃을 테니까. 돼지야, 하면서 내 얼굴을 떠올려줄 테니까.

 - 입학 축하해.

 꼭 다섯 글자였다. 우진이에게서 돌아온 답은. 정제된 글자 사이로 우진이의 결심이 엿보였다. 그만 마음을 접고 내 뜻에 따라주기로 결정한 우진이의 깊은 속내가. 주위의 만류에도 굳이 부산으로 내려갔을 때처럼. 그래서 쉽게 미안하다 말할 수 없었다. 그건 너무 잔인한 일이 될 테니까.

 - 고마워.

 보고 싶다는 말을, 그래서 참 미안하다는 말을, 턱없이 부족한 세 글자에 담아 전송 버튼을 눌렀다. 숫자 1이 없어졌는데도 답은 오지 않았다. 다음에 만나면 꼭 커피를 마시거나 술이라도 한 잔 하자고, 그 말까진 하고 싶었는데. 곧 입학식을 시작한다는 안내방송이 스피커에서 흘러나왔다. 나는 불편한 구두 안에서 발가락을 꼼지락거렸다. 내 몸피에 맞게 늘어난 노란 교복이 문득 그리웠다.






짹윙 첫글이네요 ㅎㅎ 요즘 넘나 좋은 분쏘단 ㅠㅠ
2월은 달(月)시리즈로 기획한 연작의 첫번째 글이고요
올해가 가기 전까지 5월, 8월... 이런 식으로 몇 편 더 올려보려고 해요.
연작이니까 글은 독립적이지만 느슨하게 내용은 이어지는 형식으로 써보려고 합니다.
아무튼ㅋㅋ 분쏘단 미자 탈출 만쉐!!!!! 흥해라 분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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