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물이 날 만큼 아름다운 소년이었다.

 섬뜩한 한기를 몰고서 파도는 절벽을 깎았다. 무엇이라도 집어삼킬 듯 대단한 기세였다. 차갑게 끓어오른 포말의 수직선 끝에 소년은 위태롭게 서 있었다. 다부지게 말아쥔 주먹과 다르게 피딱지가 앉은 입술은 파랗게 질려 갔다. 두려움에 젖은 두 눈을 내려감고서 소년은 결심한 듯 한 발 앞으로 내디뎠다. 마지막 힘을 다하듯 가녀린 겨울 해가 소년의 어깨 위로 부서져 내렸다. 눈이 부셔 얼굴을 찡그린 찰나였다. 절벽 아래로 소년의 몸이 기울었다. 그리곤 정직한 속도로 파도를 향해 추락했다. 같은 자리에서 생을 마감했던 수많은 영혼들처럼.

 생각할 겨를도 없이 손이 나갔다. 뒷덜미 쪽 셔츠 칼라를 틀어쥐고서 어깨에 힘을 주자 소년의 몸이 달랑거리며 끌려 올라왔다. 살았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소년의 턱을 들어올려 얼굴을 살폈다. 소년의 눈꺼풀은 완전히 감겨 있었다. 기다란 속눈썹 밑으론 눈물자국이 선명했다. 기절했나. 설마 심장마비로 죽은 건 아니겠지. 당황해서 소년의 얼굴 가까이 귀를 붙였다. 희미하지만 숨이 들락거리는 게 느껴졌다. 그 순간 감겨 있던 소년의 눈이 번쩍 하고 떠졌다.

 "으악!"
 "아이씨, 깜짝이야!"

 귀가 찢어질 것 같은 비명에 하마터면 겨우 붙잡고 있던 걸 놓칠 뻔했다. 내 덕분에 살아난 것도 모르고 소년은 발버둥을 치며 손아귀에서 벗어나려고 악을 써댔다. 정말로 죽고 싶은 건가. 나는 갸웃하며 뒤쪽으로 크게 날갯짓을 했다. 그리곤 파도가 닿지 않는 모래사장 한구석에 소년의 몸을 툭 내려놓았다. 소년은 경계심 어린 눈으로 나를 보며 천천히 숨을 골랐다. 그리곤 한참만에 영혼이 빠져나간 것 같은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쩐다."

 잘못 들었나. 미간에 주름을 만들고서 소년을 바라보았다. 눈이 마주쳤는데도 소년은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나는 구둣발로 모래를 흩뜨리며 소년의 곁으로 가까이 다가갔다.

 "왜 죽으려고 그래?"
 "왜 살아야 하는데요?"

 소년은 당돌한 목소리로 내 질문을 맞받아쳤다. 여전히 입술엔 파란 빛이 묻어 있었다. 나는 말을 잃고서 넋이 나간 채로 소년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가까이서 봐도 참 아름다운 얼굴이었다.

 "근데 누구세요?"

 두려움과 호기심이 공존하는 목소리로 소년은 조심스레 물었다. 반짝이는 눈빛은 내 몸을 관통해 등에 돋은 날개에 박혀 있었다. 바보같이 날개도 안 접고 있었다니. 어깨를 가볍게 털어 날개를 감추자 소년의 눈이 위아래로 커진다. 쩐다. 또 한 번 소년은 앓듯이 그 말을 뱉었다.

 "보통은 이럴 때 고맙다는 인사를 먼저 하지 않니?"
 "방금은 보통 일이 아니었잖아요."
 "너한테나 그렇겠지. 난 별로 놀랍지도 않다."
 "사람이 죽을 뻔했는데 그게 보통 일이 아니면 뭔데요?"

 대꾸할 말을 찾다 그냥 입을 닫았다. 잘못 답했다간 질문이 끝도 없이 이어질 것 같았다. 나는 말없이 허리를 숙여 모래에 반쯤 파묻힌 휴대전화를 뽑아 던졌다. 떨어질 때의 충격으로 주머니에서 흘러나온 모양이었다. 먹통이 된 휴대폰을 주워 들고서 소년은 아, 하며 크게 울상을 지었다.

 "어쨌든 살았으니 집에 가. 너 아직 죽을 때 아니야."
 "아직 죽을 때 아니라면서 집에는 왜 가라는데요. 집에 가면 죽는데."
 "새 아빠 지금 집에 없어. 슈퍼 앞에서 막걸리 먹는다."
 "언젠가는 집에 들어올 거 아녜요."
 "안 들어와. 취하면 애인 집에 들어가서 잘 거야."

 계부에게 젊은 애인이 있다는 사실까진 몰랐는지 소년의 눈이 탁하게 흐려졌다. 금이 쩍쩍 간 휴대전화 액정에 괜스레 손가락을 튕기며 소년은 볼이 부어 툴툴거렸다.

 "그걸 다 어떻게 아는 건데요? 신이라도 돼요?"
 "그랬으면 좀 좋았겠냐."
 "그럼 공무원? 자살 방지 위원회 뭐 그런 거?"
 "야 넌 뭐 그렇게 궁금한 게 많냐?"
 "생명의 은인인데 그 정도는 당연히 알아야죠. 무슨 일 하는데요?"
 "방금 했던 그런 일. 사람을 살리기도 하고 죽이기도 하지."

 말을 뱉고서야 아차 싶었다. 그렇게까지 자세하게는 말하지 않았어도 됐는데. 나는 소년이 아이 같은 온도로 '쩐다'고 말하기만을 기다렸다. 하지만 예상과 다르게 소년은 고요해진 눈빛으로 서늘하게 물었다.

 "그럼 그 인간 좀 죽여주면 안돼요?"
 "새 아빠 말이냐?"
 "네."
 "안 돼."
 "왜요?"
 "명이 남은 사람을 함부로 죽일 수는 없어."

 좆같네. 다시 아이 같은 온도가 되어 소년은 중얼거렸다. 죽일 수도 없고 죽을 수도 없고. 진짜 좆같네. 혼잣말이라기엔 말소리가 너무 컸다. 그래서 날 원망하고 있다는 걸 알았다. 역시 괜한 말을 했어. 나는 뒷머리만 긁적이다 머뭇머뭇 뒷걸음질을 쳤다. 더 욕먹기 전에 꺼지는 게 좋을 것 같았다.

 "가는 거예요?"
 "응. 나 바빠."
 "그럼 연락처라도 알려주고 가요."
 "폰도 망가졌으면서 어떻게 연락하려고?"
 "그럼 그쪽이 필요할 때 어떻게 불러요?"
 "부를 필요 없어. 내가 찾아올 테니까."

 소년의 놀란 얼굴이 한 번 더 보고 싶어서 나는 굳이 필요도 없는 날개를 펼쳤다. 구슬처럼 단단하고 투명한 눈동자 속엔 붉게 물든 하늘이 그림처럼 담겨 있었다. 아름다웠다. 인간의 눈에 비친 세상은.

 가볍게 발을 구르자 소년의 가슴 높이로 몸이 떠올랐다. 천천히 날갯짓을 하자 소년의 동그란 머리가 발밑으로 떨어졌다. 급하게 달려오느라 미처 몰랐는데 이렇게 보니 해변 풍경이 참 예뻤다. 죽기에 나쁘지 않은 장소란 생각이 들 만큼. 어느새 아득해진 높이까지 오른 그때, 갑자기 뭔가 떠오른 듯 소년은 벌떡 일어서서 고래고래 소릴 질렀다.

 "박지훈! 제 이름 박지훈이에요! 까먹으면 안 돼요!"

 성냥만 해진 소년의 얼굴은 이내 개미보다 작은 크기로 멀어졌다. 쩌렁쩌렁하게 맘을 울리던 목소리도 함께 멀어졌다. 내가 진짜 공무원인 줄 아나. 관공서도 아니고 이름 갖고 찾는 게 아닌데. 발상이 귀여워서 풋 하고 웃다가 얼굴이 시려 손끝으로 눈가를 쓸었다. 바닷물이 튀었는지 짭쪼름한 물기가 묻어났다.

 박지훈. 그건 열아홉 해가 걸려 찾아낸 아름다운 소년의 이름이었다.





 처음 지훈의 목소리를 들었던 건 폴란드에서였다. 나는 바르샤바 북쪽에 위치한 어느 전원주택 창가에 서 있었다. 서걱거리는 낙엽 냄새가 한산한 거리를 힘없이 나뒹굴었다. 세월의 흔적이 성실하게 묻은 낡은 우편물함엔 그랙과 리디아의 이름이 나란히 새겨져 있었다. 얼마 가지 않아 지워질 이름들이었다. 하지만 그들은 아직 그 사실을 몰랐다.

 그랙은 슈투트호프 수용소에서 살아 남은 최후의 생존자들 중 하나였다. 슈투트호프에서 부모님과 여동생을 잃은 그랙은 아우슈비츠로 옮겨지는 과정에서 극적으로 탈출에 성공했다. 종전 후 그는 동네 식료품점에서 일하던 루마니아 이민자 리디아를 만났다. 그리고 이십칠 년 뒤, 장성한 아들들과 리디아와 함께 고국으로 돌아왔다. 경제적으로 힘들었고 건강도 좋지 않았지만 십대에 겪었던 홀로코스트에 비하면 그랙의 남은 생은 축복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가족들 앞에서 최후의 숨을 아껴 쉬는 그랙을 나는 조용히 지켜보았다. 남은 시간이 다하자 리디아가 흐느꼈다. 두 아들들은 옷을 찢으며 울었다. 크리아(Kria)였다. 나는 고갤 돌려 먼지처럼 부유하고 있는 그랙을 바라보았다. 생의 반대편으로 건너온 그는 어느 때보다 홀가분해 보였다.

 샬롬.

 말뜻 그대로 평온한 얼굴을 하고서 그랙은 주름진 얼굴을 당겨 웃었다. 샬롬. 나는 두 손 모아 답했다.

 죽음 앞에 대천사(Archangel)께서 함께하시니 이보다 큰 영광이 없습니다.

 실례인 걸 알면서 웃고 말았다. 그동안 내가 만났던 이들은 대개 나를 사신이라 불렀다. 귀신이라는 사람도 있었고 저승사자라는 사람도 있었지만 천사라고 부른 건 그랙이 처음이었다.

 당신은 이미 죽었습니다.
 제가요?
 하지만 아직 완전히 죽은 것은 아닙니다.

 그랙은 당황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그럼에도 공손한 태도로 내 말에 귀를 기울여주었다.

 영(靈)을 거두기 전에 당신에게 들려줄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것은 이미 수백 번 되풀이된 길고 지난한 이야기였다. 그랙은 인내심 있게 그 이야기를 다 들었다. 내가 하는 말을 온전히 이해했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이야기의 끝에서 그랙은 눈물을 흘리며 말했다.

 저는 평생 리디아를 사랑했습니다.
 알고 있습니다.
 그녀를 두고 떠나야 한다는 것만이 저를 괴롭게 합니다.
 걱정하지 마세요. 그녀도 곧 당신과 함께 할 겁니다.

 하지만 그 전에 당신은 모든 기억을 잃을 거라고. 그녀와 함께했던 소중했던 시간들은 물론 슈투트호프에서의 악몽과 조금 전 내가 들려주었던 이야기까지. 하나도 남김없이 깨끗하게 잊고서 완전히 다른 존재가 되어 세상을 떠돌게 될 것이라고. 가는 귀가 먹어 구슬프게 눈물만 흘리던 그랙에게 나는 차마 말할 수 없었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평온히 그의 영혼을 거두어가는 것뿐이었다.

 샬롬.

 방 안을 고요히 울리던 랍비의 기도 위에 마지막 인사가 쓸쓸히 내려앉았다. 손끝을 모아 가볍게 퍼뜨리자 그랙은 형체없이 부서졌다. 동시에 어디에선가 연약한 갓난애의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희미하지만 분명하게. 그건 마치 별빛과 같았다. 환하게 빛나고 있지만 거리가 너무 멀어 집중하지 않으면 알아채기 힘들었다.

 일주일 뒤, 리디아는 심장마비로 세상을 떠났다. 그녀의 영을 거둔 뒤 나는 세상 곳곳을 돌아다녔다. 별빛 같은 목소리는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불쑥불쑥 들려왔다. 총과 포탄이 날아다니는 전쟁터와 난민들이 수장된 바다 한가운데에서도. 잿더미가 된 시장과 테러로 무너진 건물 아래에서도. 진창 같은 세상에 던져진 갓난애의 울음은 학대와 결핍으로 멍이 든 아이의 간절한 기도가 되었다가 죽음만이 유일한 구원이라 믿게 된 소년의 절망이 되어 나에게 도달했다. 고통받고 죽어가는 수많은 인간들 틈에서도 나는 소년의 목소리를 똑똑히 알아들을 수 있었다. 내가 누군지도 모르면서 소년은 나를 찾고 있었다. 얼굴도 이름도 모르면서 나 역시 소년을 찾았다.

 열아홉 해였다. 목소리의 주인을 만나기까지는. 소년의 이름은 지훈이었다. 다른 인간들이 그랬던 것처럼 지훈은 아무 것도 모르고 있었다. 아무 것도 모르면서 죽으려 하고 있었다. 아직은 때가 아니어라. 아름다운 얼굴의 소년을 위해 내가 해줄 수 있는 일은 아무 것도 없었다.

 아직은. 어쩌면 아직도.

 바싹 말라 있던 낙엽 냄새도, 주름이 촘촘히 겹쳐져 있던 그랙의 얼굴도, 기억이 흐려져 더 이상 그려지지 않는다. 샬롬. 갈 곳 잃은 인사는 한 많은 영(靈)처럼 어딘가로 흩어진다.





 보고 싶어.

 이따금씩 소리는 먼 곳이 아닌 내 안에서 들려왔다. 날개를 펼칠 겨를도 없었다. 생각과 동시에 내 몸은 이미 절벽 위에 있었다. 짜고 비린 바다 냄새가 반갑게 나를 맞았다.

 "어?"

 지훈은 놀란 토끼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학교에서 돌아오는 길인지 교복차림이었다. 곁에는 고물상에 갖다 팔아도 안 받아줄 것 같은 낡은 자전거가 서 있었다.

 "뭘 그렇게 놀라. 불렀잖아."
 "아닌데."
 "맞을 걸?"

 아니라고 발뺌할 땐 언제고 지훈은 머리를 긁적거리며 수줍게 웃었다. 추위 때문인지 동그랗게 올라온 뺨이 잘 익은 자두처럼 붉어졌다.

 "부른 건 아니고. 궁금해서 다시 와봤어요. 처음에 여기서 만났으니까. 여기로 오면 혹시 볼 수 있을까 해서."

 나는 대꾸하는 대신 바닷바람에 펄럭이는 교복 자켓만 멀거니 바라보았다. 키가 더 자랄 것을 고려해 처음부터 일부러 옷을 크게 맞췄는지 셔츠와 자켓이 몸에 비해 헐렁했다. 바짓단도 길었다. 물려받은 옷인가. 그럴 수도 있겠단 생각이 들었다.

 "추운데 여기 계속 있을 거야? 집에 가야지."
 "보기만 하면 집에 가래."
 "너 고3 아니냐? 공부 안 해? 야자 안 가? 학원은?"
 "와 잔소리 쩔어. 대학도 안 갈 건데 공부는 해서 뭐해요?"
 "공부 안 하면 졸업해서 뭐하게?"
 "돈 벌어야죠."

 누군가에겐 당연할 사교육과 입시는 지훈에겐 다른 세상의 일이었다. 그래서 '야자'나 '학원' 같은 단어를 듣고도 시샘이나 박탈감을 느끼지 않는 것 같았다. 그래도. 엉뚱하게도 나는 약간의 억울함을 느꼈다. 남들보다 조금 더 단단하다는 이유로 한 인간에게 이렇게나 많은 불행을 몰아주는 것은 부당하지 않은가. 고작 열아홉인데. 이제 열아홉일 뿐인데.

 "저... 생각해봤는데요."

 할 말이 있는 듯 지훈은 마른침을 삼키며 내 눈치를 보았다. 처음부터 할 말이 있어서 부른 거였나. 나는 바지 주머니에 두 손을 찔러넣은 채 댕글댕글 눈을 굴리는 지훈을 보았다.

 "새 아빠는 못 죽인다고 했잖아요."
 "또 그 얘기냐?"
 "끝까지 들어봐요. 그럼 다른 건 가능할 수도 있단 얘기죠?"
 "예를 들면?"
 "예를 들면, 돌아가신 우리 아빠를 살려낸다거나."

 지훈은 내가 했던 말실수를 진심으로 새겨 들은 모양이었다. 순수한 믿음으로 가득찬 눈동자 너머 십여 년 전 공사 현장에서 숨을 거둔 부친의 얼굴이 비쳤다. 내 힘으로 어쩔 수 없는 일인 걸 알면서도 그런 것을 엿봤다. 일종의 직업병이었다. 무안해져 괜한 헛기침을 뱉고서 입을 열었다.

 "미안. 사람 살리는 건 내 소관이 아니라."
 "그게 무슨 소리예요?"
 "나랑 붙어다니면서 같이 일했던 친구가 있거든. 사람 살리는 건 그 친구 소관이야. 난 사람을 죽이.... 죽은 사람 혼을 거두는 일만 해."
 "그 친구 분한테 부탁해보면 되지 않을까요?"

 자신의 행동이 무례할 수 있단 걸 알면서도 지훈은 끈질기게 매달렸다. 그만큼 절박했던 것이리라. 나는 좌우로 고개를 저었다.

 "힘들 것 같아. 사고를 쳐서 근신 중이거든."
 "무슨 사고를 쳤는데요?"
 "딴 데에 정신이 팔려서 살려야 될 사람들을 못 살렸지."
 "헐. 천사가 그런 실수도 해요?"
 "너 방금 천사라고 했냐?"
 "네. 맞잖아요. 아니에요?"

 나는 피식 웃으며 지훈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아무래도 공무원보다는 천사 쪽이 듣기에 좋았다.

 "다니엘은 실수한 적 없어요?"
 "다니엘? 그게 누군데?"
 "그쪽이요. 이름을 몰라서 그냥 그렇게 부르기로 했어요."
 "있어. 실수한 적."
 "알았다. 그 친구 분 사고 쳤을 때 같이 엮였구나. 맞죠?"
 "비슷해. 그래서 이렇게 벌 받고 있는 거고."
 "벌? 이게 벌 받는 거예요?"
 "그럼 내가 왜 인간 세상에 내려와서 너랑 이러고 있겠냐?"
 "뭐야. 그런 거였어요? 좀 서운하네."

 아무 것도 모르면서 지훈은 진심으로 섭섭하단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는 그만 엄마 일을 도우러 가야 한다며 고물 자전거를 끌고 절벽길을 내려왔다. 나는 두어 발짝 뒤에서 지훈이 가는 길을 따라 걸었다. 행여나 내가 말도 없이 사라질까봐 걱정됐는지 지훈은 몇 번이나 뒤를 돌아보았다. 그럴 때마다 모래와 자갈이 고르지 않게 깔린 험한 길 위에서 자전거는 풀썩이며 부서질 듯 튀어올랐다. 그제야 지훈은 돌아보던 것을 멈추고 자전거 핸들을 손끝이 다 하얘지도록 꽉 잡아 붙들었다. 고작 열아홉인데 얼마나 험한 일을 많이 겪었는지 손가락이 마디마다 트고 갈라져 아이의 것 같지 않았다. 이로 물어뜯어 손톱은 끝단이 너덜너덜했다. 혹사 당한 소년의 손을 물끄러미 내려다보다가 나는 홀린 듯이 말해버렸다.

 "지훈아."
 "네?"
 "부탁이 있는데."

 건널목을 앞에 두고서 지훈은 자전거를 당겨 세웠다. 지훈의 어깨 너머로 횡단보도가 보였다. 나는 다시 한 번 소년과 눈을 맞췄다. 2차선 도로를 건너 경사진 오르막을 따라 오르면 지훈의 집이었다. 지훈의 어머니가 운영하고 있는 과일가게는 골목에서 왼쪽으로 꺾어 들어간 샛길 끝자락에 있었다. 지훈은 그곳에서 손님들이 주문한 과일을 자전거로 배달하는 일을 했다. 잠깐의 눈맞춤으로 나는 그 모든 것을 읽었다. 이번엔 직업병이 아니라 오지랖이었다. 나는 그걸 애정 어린 관심이라 기꺼이 오해하기로 마음먹었다.

 "우리 여기서 신호등 세 번 바뀔 때까지만 있다가 가자."

 좋아요. 지훈은 기다란 속눈썹을 몇 번 깜박거리더니 산뜻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리곤 첫 번째 녹색불이 들어오기도 전에 지루한 침묵을 못 이기고 마구 질문을 퍼부어대기 시작했다. 날개는 언제 나오는 거예요? 아프진 않아요? 울버린은 클로가 튀어나올 때마다 살을 찢어서 아프다고 하던데. 나는 거 말곤 뭐 할 줄 알아요? 운전은 못 해요? 자전거는? 자그마한 새처럼 조잘대는 지훈을 나는 조용히 방관했다. 에이, 시시해. 지훈이 투덜거림과 동시에 두 번째 녹색불이 켜졌다.

 "왜 죽으려고 했니?"

 갑작스런 질문에 지훈은 좀 당황한 듯 보였다. 그러나 곧 낯빛을 고치고 웃었다. 결코 가볍지 않은 상처를 농담처럼 연기하는 소년의 태도는 서글플 만치 어색했다.

 "왜일 것 같아요?"
 "때린다고 다 맞지 않아도 되잖아. 피해도 되고 막아도 되잖아."
 "내가 안 맞으면 엄마가 맞아요."
 "도망갈 생각은 안 해봤어?"
 "엄마는 나 때문에 그 사람이랑 결혼했어요. 내가 애비 없는 자식이라고 욕 먹고 무시당할까봐, 술만 먹으면 개가 되고 손버릇이 나빠진다는 걸 알고서도 그런 남자라도 같이 살기로 결심한 거예요. 그런데 그런 엄마를 두고 어떻게 나 혼자 살자고 도망가요."

 제법 어른스러운 말을 담담하게 뱉는 지훈을 나는 함부로 칭찬하거나 쓰다듬을 수 없었다. 불쑥불쑥 튀어나오는 인간의 선함은 종종 나를 당혹스럽게 했다. 그럴 때면 나도 인간이 된 것처럼 그들의 통증과 체념을 느낄 수 있었다. 그 감정이 처음부터 내 것이었던 양.

 "그 사람 얼마나 더 살아요?"
 "남들만큼 살아."
 "우리 엄마는요?"

 나는 세 번째 녹색불이 점멸하는 것을 말없이 지켜보았다. 사람은커녕 개미 한 마리 얼씬거리지 않던 2차선 도로 위로 묵직한 엔진소리가 전조처럼 깔렸다. 지훈은 눈을 가늘게 뜨고 도로 끝을 노려보았다. 파란색 5톤짜리 덤프트럭이 다가오고 있었다. 나는 횡단보도 건너를 바라보았다. 오르막 끝에서 누군가 빠르게 달려 내려오는 것이 보였다. 부스스한 파마 머리를 엉망으로 휘날리며 한 여자가 전력을 다해 맨발로 뛰고 있었다. 여자는 멈출 생각이 없어 보였다. 그건 덤프트럭도 마찬가지였다. 세 번의 신호를 흘려보낸 횡단보도 앞에서 둘은 정확한 직각을 이루며 만났다. 지훈의 부푼 눈동자 위로 때늦은 비명이 길게 울려퍼졌다. 고무 타는 매캐한 냄새와 기분 나쁜 마찰음이 그 뒤를 따랐다.

 "엄마!"

 지훈은 자전거도 내던지고 도로에 쓰러진 여자에게로 달려갔다. 여자는 망가진 인형처럼 팔다리가 꺾인 채 몸이 비틀어져 있었다. 깨진 머리통에서 흐른 핏물이 지훈의 헐렁한 교복을 빠르게 적셨다. 오르막 쪽에서 한 남자가 비틀거리며 다가왔다. 썅년이. 남자는 옷차림과 전혀 어울리지 않는 야구 배트를 들고서 벌겋게 취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눈앞에서 사고를 목격하고도 전혀 상황파악이 되지 않는 모양이었다. 나는 목이 터져라 구급차를 외치는 지훈의 어깨를 부드럽게 감싸쥐었다. 정신적 충격을 그대로 흡수한 소년의 몸은 안타까울 정도로 벌벌 떨리고 있었다.

 말할 수 없었다. 너를 붙잡아두지 않았다면 길바닥에서 피를 흘리는 건 여자가 아닌 네가 되었을 거라고. 자전거 브레이크가 망가져 있다는 걸 깨달았을 땐 이미 너무 늦었을 거라고. 엄마는 결국 돌아가시겠지만 오늘 사고가 아니었더라도 계부에게 맞아 죽었을 거라고. 내가 아무리 어깃장을 놓아도 인간의 운명을 바꿀 수는 없다고.

 손바닥을 타고 지훈의 괴로움이 내게로 흘러든다. 결코 마르지 않는 바다처럼 슬픔은 모두의 안에서 찰랑인다. 이것이 나의 천형(天刑)이구나. 깨달음은 깊이 침잠한다.





 그런 때가 있었다. 인간이 인간을 죽이지 않고 태평하고 온화하게 살아가던 때가. 모든 생명이 순리와 흐름에 따라 완만하게 살아지던 때가. 신의 섭리가 들판의 잎새 하나 곡식의 낱알 하나에까지 깃들어 있던 그런 때가. 하지만 하늘의 실수로 지상의 풍경은 완전히 달라졌다. 세상이 달라졌어도 나는 여전히 인간의 숨을 거두었고 그들을 연민하지 않았다. 그 탓에 내가 거둔 영의 이름 하나 기억하지 못했다. 내가 하는 일에 죄책감을 느끼지 않으려면 의당 그래야 했다. 그러는 것이 옳았다.

 루이. 그건 내가 최초로 기억한 인간의 이름이었다. 몰락한 왕조의 마지막 황태자였던 루이. 다섯 살에 부모와 떨어져 타국에 볼모로 잡혀 들어간 루이. 자신의 왕국이 몰락한 뒤에도 수많은 암살 시도에 시달렸던 루이. 결국 고국으로 돌아오지 못하고 정파 싸움에 휘말려 타국에서 비참하게 살해 당한 루이.

 내가 도착했을 때 루이는 하얀 침대보를 그러쥐며 낮게 신음하고 있었다. 가슴에는 날렵한 단검이 깊이 꽂혀 있었다. 고작 열일곱이었지만 루이는 죽음 앞에서도 당당하고 침착했다. 나를 보고도 경망스레 놀라거나 비탄에 빠져 절망하지 않은 걸로 보아 그랬다. 다만 푸른 눈을 마주치며 제발, 하고 작게 애원할 따름이었다. 그 눈빛을 차마 외면할 수 없어서 나는 단단히 박혀 있던 검을 뽑아 던지고 루이의 몸을 침대에 바로 눕혔다. 인간의 몸에 직접 손을 댔던 것은 그게 처음이었다.

 당신이 왜 낯설지 않은 걸까요.

 루이는 바람이 많이 섞인 소리로 속삭이며 미소지었다. 그리곤 피 묻은 손으로 내 뺨을 어루만졌다. 그리운 얼굴이야, 라며. 그렇게 말하던 루이의 금발은 사랑스럽게 곱슬거렸다. 그 또한 처음이었다. 인간의 손이 나의 몸을 만진 것은. 순간 몸이 감전된 것처럼 루이의 외로움이 혈관을 타고 내 몸을 떠돌았다. 우울한 동시에 가슴이 벅차올랐다. 알 수 있었다. 나는 루이를 알았다.

 너에게 들려줄 이야기가 있어.

 나는 숨이 꺼져가던 루이에게 오래도록 봉인했던 비밀을 누설했다. 인간에게 바치는 고해성사와 같았다. 루이는 힘이 다 빠진 손으로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다행이다. 그건 루이가 남긴 마지막 말이었다. 따뜻한 눈물이 그의 안에서 세상 밖으로 흘러나왔다. 그의 영을 거두는 내 눈에서도 루이의 것을 닮은 눈물이 흘러내렸다.

 목소리를 듣기 시작한 건 그 후의 일이다. 누구의 것인지 모를 희미한 목소리는 그 생이 다할 때까지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환청처럼 나를 찾아왔다. 소리를 따라 이끌리듯 가보면 그곳엔 어김없이 인간이 있었다. 실의와 비탄에 빠진 나약한 인간이. 그건 루이였다. 이름도 나이도 생김새도 쓰는 언어도 모두 달랐지만 모두 인간이었고 전부 루이였다. 죽음으로도 달라지지 않는 단 하나의 존재였다.

 인간을 연민한다는 것이 어떤 일인지 알게 해준 너. 내 안의 슬픔을 처음 일깨우고 떠나간 너. 그렇게 최초의 이름으로 남은 너.

 곱슬거리던 루이의 머리칼이 문득 그리워진다.





 뭐라도 쏟아질 듯 컴컴하게 흐린 날이었다. 나는 구름 뒤에 멀찍이 숨어서 유골함을 들고 있는 지훈을 내려다보았다. 고작 일주일 못 봤을 뿐인데 그새 키가 크고 야위어 다른 사람처럼 보였다. 깊은 상실감으로 소년의 청량함을 잃은 건지도 몰랐다. 그늘진 청년의 얼굴을 하고서 지훈은 유골함에 손을 넣어 모친의 뼛가루를 바다에 흩뿌렸다. 계부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가지 마요."

 어머니에게 남기는 마지막 말일까. 아니면 내가 여기 있다는 걸 알고서 하는 말일까. 나는 뼛가루가 바람에 휩쓸려 엉뚱한 곳으로 날아가지 않도록 조심히 날개를 접어 벼랑을 딛고 섰다. 지훈은 텅 빈 유골함을 내려놓고 내 곁으로 다가와 쪼그려 앉았다. 세찬 바람이 지훈의 밤색 머리칼을 엉망으로 헝클어뜨렸다.

 "납골당에 모시고 싶었는데 많이 비싸더라고요. 물이 차가워서 엄마가 싫어할 텐데. 미안해 죽겠네."

 묻지도 않은 말을 하면서 지훈은 멋쩍게 웃었다. 그리곤 등을 돌려 울었다. 아슬아슬한 벼랑 끝에서 지훈의 몸은 위험하게 휘청거렸다. 나는 황급히 지훈의 팔을 잡고 끌어당겼다. 다 끝났다는 허무함에 긴장이 풀려서인지 지훈은 좀처럼 바로 서질 못했다. 보다못해 나는 지훈을 들처업고 벼랑길을 걸어 내려왔다. 갈림길에선 잠시 고민했지만 큰길 대신 해변을 택했다. 오늘만큼은 차마 집으로 돌아가란 말을 할 수가 없었다.

 걸었다. 쓸쓸한 겨울바다를. 우리 둘이서. 지훈은 아이처럼 내 등에 가만히 얼굴을 파묻고 시린 파도 소리를 온몸으로 들었다. 눈물이 맺혀 축축해진 속눈썹이 자꾸만 뒷덜미를 간지럽혔다. 다니엘. 지훈은 입술을 달싹여 내 이름을 불렀다.

 "작별인사를 하려고 불렀어요."
 "......"
 "여길 떠나려고요."

 지훈의 부드러운 입술이 어깨 위로 더운 숨을 내뱉었다. 길고 느린 호흡이었다. 차분함과 불안함이 동시에 느껴지는 목소리로 지훈은 속엣말을 털어놓았다. 엄마가 돌아가시면서 자신의 앞으로 보험금을 남겨두었다는 것. 그걸 새 아빠가 알게 되었다는 것. 미성년자라 당장은 그 돈을 받을 수 없지만 법적으로 성인이 되면 보험금을 수령할 수 있다는 것. 그 전에 새 아빠는 무슨 수를 써서라도 그 돈을 빼앗으려 들 거라는 것. 거기까지 말하고 지훈은 고개를 돌려 반대편 뺨을 내 등에 갖다댔다. 서울에 가서 새출발을 하고 싶어요. 지훈은 말했다. 시작은 고생스럽겠지만 열심히 살아서 보란 듯이 성공할 거라고. 엄마도 그러길 바라고 있을 거라고.

 "나중에 보험금 타면 고양이도 키우고 깨끗한 집으로 이사할 거예요. 새로 사귄 친구들도 불러서 집들이도 할 거고요.
 "...그래."
 "다니엘도 부르면 와줄 거죠?"

 물론이지. 그 짧은 거짓말이 어려워 나는 아무 말도 못 하고 걸음을 멈췄다. 언제든, 어디든, 나는 네 곁에 있을 거라고. 내가 너를 찾고 네가 나를 찾을 거라고. 말하지 못하고. 그런 약속 하나 하지 못하고.

 하늘이 어두웠다. 한밤 같은 한낮이었다. 내 마음이 꼭 그랬다.





 집으로 돌아가자마자 지훈은 짐을 쌌다. 마침 계부는 외출중이었다. 부엌엔 밀린 설거지감과 빈 소주병이 가득했다. 엉망인 집안꼴을 보고서 지훈은 집을 나올 마음을 굳혔다. 이대로 곧장 터미널로 가 심야버스를 타고 서울로 올라갈 생각이었다. 간단한 소지품과 갈아입을 옷을 챙겨 지훈은 집 밖을 나섰다. 그러다 퍼뜩 엄마의 유품을 챙기지 않았다는 걸 깨닫고 다시 집안으로 들어갔다. '그 사람'이 엄마가 소중히 여기던 물건들을 쓰레기통에 처박거나 값싸게 팔아넘기는 상상을 하는 것만으로도 소름이 끼쳐 견딜 수 없었다.

 엄마의 오래된 문갑에는 값진 물건이라곤 하나도 없었다. 들어 있는 거라곤 지훈이 학교에서 타온 상장과 통지표, 색종이 카네이션 같은 게 전부였다. 오래된 앨범도 하나 있었다. 앨범 속에서 지훈은 갓난아이였던 자신을 안고 있는 친부의 사진을 발견했다. 세 가족이 단란하게 찍은 가족 사진도 있었다. 가져가야겠다. 지훈은 앨범을 꺼낸 뒤 문갑을 닫았다.

 "너 이 새끼 거기서 뭐 하는 거야?"

 목소리만 듣고도 지훈은 계부가 취했다는 것을 알았다. 그것도 완전히 만취했다는 것을. 소중한 것을 빼앗기지 않으려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러하듯, 지훈은 반사적으로 앨범을 등 뒤로 감췄다.

 "술 처먹고 들어왔으면 곱게 자요. 시비 걸지 말고."
 "뭐야?"
 "비켜요. 나갈 거니까."
 "뒤에 감춘 건 뭐야? 돈이야?"

 경멸어린 시선으로 지훈은 계부를 노려보았다. 하지만 술 취한 계부는 지훈이 자신의 말을 무시했다고만 여겼다. 자신의 말을 무시함으로써 자신을 업신여겼다고 느꼈다.

 "내놔."
 "좋은 말로 할 때 비켜."
 "이 새끼가 애미 따라 뒤지려고 환장을 했나."

 지훈은 자신의 마지막 인내심이 끊어지는 것을 느꼈다. 분노가 만든 초인적인 힘으로 지훈은 계부의 어깨를 떠밀고 방에서 뛰쳐나갔다. 계부는 크게 엉덩방아를 찧으며 방구석에 나동그라졌다. 지훈은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그럴 이유가 없었다.

 뒤축이 다 닳은 운동화에 발을 구겨넣고 지훈은 챙겨놓은 짐과 앨범을 들었다. 손이 부족해 문은 어깨로 밀고 나와야 했다. 녹이 슨 대문은 열고 닫을 때마다 귀를 찢을 듯 날카로운 소리를 냈다. 아무 것도 듣지 못한 것은 그 때문이었다. 지훈은 짐작조차 하지 못했다. 방에 엎어져 있는 줄로만 알았던 계부가 부엌칼을 들고 제 뒤를 쫓은 것을. 온전치 못한 정신에 그 칼을 휘두를 생각을 했단 것을.

 나는 더 지켜보지 못하고 질끈 눈을 감았다. 바닥에 챙, 하고 칼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황급히 달아나는 경황없는 발소리도 들렸다. 소음이 모두 사라진 후에야 나는 감은 눈을 떴다. 지훈은 파란 대문에 기대어 철철 피를 흘리고 있었다. 건강하게 그을린 목덜미에선 선연한 핏물이 봇물처럼 터져나왔다.

 다니엘.

 소리내지 않아도 들을 수 있었다. 지훈은 눈으로 나를 찾았다. 바라보는 눈이 글썽였다. 나는 지훈의 작은 머리를 조심히 들어올려 품에 안았다. 그리곤 천천히 눈을 맞췄다. 소리내지 않아도 들을 수 있도록. 내 안의 모든 비밀이 소년에게 흘러들 수 있도록.

 지훈아.
 지금부터 너에게 들려줄 이야기는 이미 네가 들었던 것이다.
 듣고도 잊었던 것이다. 혹은 잃었던 것이다.
 신의 가호 아래 수천 년을 함께하며 우리는 하늘과 지상을 이었다.
 네가 인간에게 생을 선물하면 나는 그 생의 끝에서 인간과 만났다.
 우리는 함께였다. 언제까지나.
 너는 신이 만든 창조물 중에서 가장 아름다웠다.
 사랑하지 않을 수 없게 아름다웠다.
 내겐 인간을 돌보는 것보다 너에게 입맞추는 일이 더 기뻤다.
 너의 몸을 안고 달콤한 말들을 속삭이느라 지상의 일은 뒷전이 되었다.
 지옥이 된 인간 세상을 보고서 신은 크게 노해 우리를 그 지옥 속으로 떨어뜨렸다.
 천상의 기억을 잃고 인간으로 태어나 불행한 삶을 살다 죽길 반복하라. 그것이 네가 받은 벌이었다.
 너는 몰락한 왕가의 마지막 왕자였고 홀로코스트에서 살아 남은 최후의 생존자였다.
 너는 수없이 살았고 수없이 죽었다.
 루이와 그랙 사이에 일일이 읊을 수도 없는 많은 이름들이 네게 머물다 떠나갔다.
 네가 죽을 때마다 나는 네게 같은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너는 매번 울었고 매번 기억하지 못했다.
 지훈아.
 그러니 네게 닥친 삶이 불행해도 서글퍼 말아라. 너는 이미 그 불행을 여러 번 반복해 겪었다.
 외로움이 귀를 막고 그리움이 눈을 가려도 슬퍼 말아라. 그때마다 나는 너의 곁에 있었다.
 너를 들었고 너를 보았다. 너를, 사랑했다.
 단 한 순간도 사랑하지 않은 순간이 없었다.
 지훈아.
 잊어라. 갓난아이처럼.
 살아라. 처음인 듯이.
 우리는 반드시 다시 만나 사랑할 것이다.
 내가 너를 찾고 네가 나를 찾을 것이다.
 함께할 것이다. 언제까지나.

 까맣게 부풀어오른 눈동자는 조금씩 싸늘하게 식어갔다. 쌕쌕 몰아쉬던 숨도 어느새 잔잔해 있었다. 나는 젖은 얼굴로 숨을 거둔 소년의 눈을 감겨주었다.

 나도 사랑해, 다니엘.

 깃털처럼 가벼워진 지훈의 영혼이 나를 보며 방긋 웃었다. 벌어진 입술 사이로 뜨거운 숨이 울음처럼 터져나왔다. 손을 뻗자 지훈은 반짝이는 뼛가루처럼 공중으로 흩어졌다. 이미 사라졌다는 걸 알면서도 나는 부질없이 검은 하늘을 더듬었다.

 살랑, 하고 코끝이 간질거렸다. 작은 눈송이가 얼굴 위로 내려앉았다. 첫눈이었다. 안녕. 작별인사를 전하는 내 눈에 찰랑 별빛이 일렁였다. 어디에선가 갓난애의 울음소리가 희미하게 들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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